생활의 발견

기묘한 관계

iamlitmus 2007. 3. 26. 15:05
심야영화를 보러가기로 했다. 그의 집에 갔을때, 어머니는 친척집에 가셨다고 했다. 배고프다고 했더니, 라면을 끓여주겠다고 한다. 남들 시켜먹는 데에 이골이 난 사람이 끓여주는 라면 한번 먹어보기로 하고 가만히 지켜보는데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다.
따로 물을 끓여 면을 살짝 데쳐낸 뒤, 다시 다른 냄비에 물을 끓여 라면을 삶아낸후 예쁜 그릇에 담아서 김치와 함께 내놓는다.
/대단하네.
/이렇게 하면 담백하거든.

극장으로 향했다. 그는 영화를 볼때, 무언가를 먹는 것도 부스럭거리는 소리도 끔찍하게 싫어하는데, 하필 뒷자리에 앉은 여자애들이 줄기차게 떠들어대자 잔뜩 기분이 상해 버렸다. 영화가 끝나고 자리에서 일어나 뒤를 돌아보았을때, 동남아팀 김계장이 서 있었다. 반갑게 인사하고, 그를 소개시켜주려는데, 그는 고개를 외로 꼬고는 먼저 나가버린다. 황급히 따라 나가니 입이 댓발이나 나와있다.
/넌 어떻게 저런 에티켓을 가진 애랑 알고 있니?
/회사 직원인걸 어떻해요.
/공공장소에서 그렇게 떠들면 안된다고 말을 했어야지. 웃음이 나오니?
/모두 내 맘 같을 수는 없잖아요.
/그러니까 따끔하게 말했어야지. 꼭 말해. 알았어?
/영화 재밌게 봤잖아. 기분 풀어요.
/왜 대답안해? 알았어?
/알았어요.

아는 닭발집이 있다고 가자고 한다. 세상에. 닭발이라니.
/저 못먹는데요.
/안먹어본거지. 못먹는게 어딨니.

아는 집이라더니 내내 못찾고 빙빙 돈다.
/다음에 가기로 하구, 오늘은 그만 가요.
/아냐. 지금 먹고 싶어. 이상하다. 이 골목이 맞는데..저쪽으로 한번 더 가보자.
집요한 인간. 결국 기어코 찾아냈다. 허름하기 그지없는 선술집분위기에 닭발의 잔해가 사방에 넘쳐나는 집이었다. 시큼해보이는 행주로 대충 닦아준 식탁에 앉아 있으려니 피부결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닭발 접시가 놓여졌다. 그는 비닐장갑을 신중하게 낀뒤, 발톱을 제거한 닭발을 하나씩 훑어나가기 시작했다.
/먹어봐. 퀄리티가 아주 그만이야.
/전 그냥 닭꼬치 먹을께요. 물줄까?

순간, 그의 눈매가 매서워진다.
/이젠 아예 대놓고 반말을 하는구나.
/내가 반말하는게 그렇게 기분나빠요? 마음이 냉동고가 될만큼?
/그정도는 아니지만. 어쨌든 옳은 건 아니잖아.
/우리가 만난지 5년정도 되었잖아요. 난 반말정도는 해도 된다고 생각했는데.
/친하면 다 반말하니? 얼마전에 C회사 홍보담당자랑 술자리가 있었는데, 처음 본 사이인데도 반말을 하는거야. 내가 그랬어. 왜 반말하니?
/그건 비교기준이 다르잖아요. 그 사람은 사회적 관계이고, 난 아니잖아.
/사회적 관계가 아니면 그래도 된다구? 그럼, 내가 네 오빠랑 처음 만났는데, 반말을 해도 되겠네?
/그거랑도 다르지. 난 5년이라니까? 자그마치 5년이라구욧!

부아가 치밀어 올라, 그가 먹던 막걸리를 그릇에 부어 마셔버렸다.
/이제 해도 바뀌어서 한살 더 먹었으니, 호칭을 바꿀래요.
/훗. 뭘로? 이부장이라고 부를래?
/사회적 관계가 아니라니까. 아저씨.
/그래라. 아저씨.

계산하려고 먼저 일어난 그가 한참을 주인과 이야기하더니 뒤돌아서서 말한다.
/진영, 카드가 안된대. 너 돈 있어?
그러고는 나가버린다. 9천원을 내고 나오니, 그가 기쁜듯이 말한다.
/너무 훌륭하지 않니? 닭발에 막걸리에 닭꼬치까지 먹었는데 9천원이야.

그의 집앞에 다다르자 그가 내 손을 부여잡고 말한다.
/보여주고, 먹여주고. 오늘 너무 고마워. 조심해서 가.
차문을 열고 나서던 그가 꼼짝을 안하더니 뭐라고 중얼댄다.
/뭐라구요?
/날 밀어달라구.
언덕이라 경사가 심해 내리지 못하고 있는거였다.
힘껏 그의 등을 밀자 얼른 총총거리며 뛰어간다.

도대체 이런 관계는 뭐란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