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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중앙박물관-사유의 방

by iamlitmus 2021. 11. 19.

‘반가사유상’이라는 명칭은 상의 자세에서 비롯되었다. ‘반가 半跏’는 양쪽 발을 각각 다른 쪽 다리에 엇갈리게 얹어 앉는 ‘결가부좌 結跏趺坐’에서 한쪽 다리를 내려뜨린 자세이다. ‘사유 思惟’는 인간의 생로병사를 고민하며 깊은 생각에 잠긴 상태를 나타내며, ‘반가의 자세로 한 손을 뺨에 살짝 대고 깊은 생각에 잠긴 불상’을 반가사유상이라고 한다.

두 점의 반가사유상에는 삼국시대의 최첨단 주조 기술이 담겨 있다. 주조 과정을 살펴보면, 먼저 수직과 수평의 철심으로 불상의 머리에서부터 대좌까지 뼈대를 세운 뒤에 점토를 덮어 형상을 만든다. 거기에 밀랍을 입혀 반가사유상 형태를 조각한 다음, 다시 흙을 씌워 거푸집(외형)을 만든다. 거푸집에 뜨거운 열을 가하면 내부의 밀랍이 녹아 반가사유상 모양의 틈이 생기고, 여기에 청동물을 부어 굳힌 다음 거푸집을 벗기면 반가사유상이 완성된다.


이때 청동물이 굳으면서 거푸집이 깨질 수도 있기에, 매우 세심한 제작 기술이 필요하다. 두께 0.2~1.0cm 정도, 크기 1m에 가까운 금동 반가사유상을 만들어 낸 삼국시대 주조 기술과 그 수준은 세계인이 놀랄 만큼 돋보인다. 주조 후 거푸집을 고정했던 장치나 못을 제거한 흔적도 보이지 않아 그 당시 금속 가공 기술이 매우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 두 점의 반가사유상은 제작 당시에 보수했거나 후대에 수리를 했던 흔적이 남아 있지만 사람의 눈으로는 확인하기 어렵다.

두 점의 국보 반가사유상을 언제 어디에서 만들었고, 어느 장소에서 어떻게 발견했는지는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다. 국보 반가사유상(전시실 오른쪽) 한 점은 1912년 이왕가李王家박물관이 일본인 고미술상 가지야마 요시히데梶山義英에게 2,600원이라는 큰돈을 주고 구입했다. 또 다른 한 점(전시실 왼쪽)은 같은 해에 조선총독부가 사업가이자 골동품 수집가인 후치가미 사다스케 淵上貞助에게 4,000원을 보상해 주며 구입했고, 1916년 조선총독부박물관이 입수했다. 조선총독부박물관은 1945년 국립박물관이 인수하였고, 이왕가박물관(덕수궁미술관) 소장품은 1969년 국립박물관에 통합되었다. 반가사유상을 보존하고 있던 사찰과 만든 곳을 짐작하게 해주는 단서들은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으며, 옛 사람들의 말을 통해 전해질 뿐이다. 보관 상태, 장신구, 옷 주름 등의 모양으로 살펴볼 때 7세기 전반에 제작된 반가사유상(전시실 오른쪽)은 신라에서 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