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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 발견

그 남자

by iamlitmus 2007. 3. 26.
그 남자와 만나기로 한 곳은 주말의 인사동 한복판이었다. 주말에는 거의 외출을 안하지만, 마침 보고 싶은 영화가 근처에서 상영되고 있었기에 겸사해서 약속을 잡았다. 동성연애자들이 우글거린다는 그 극장은 언제부터인가 독립영화를 전문으로 상영하는 극장으로 바뀌어 멀티상영관이 넘쳐나는 종로에서 간신히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언제나 그랬듯이 인사동은 인파로 넘쳐났고, 때를 맞추어 여성인권 관련 행사까지 열리느라 소란하다. 적당한 햇빛과 선선한 바람이 부는 날씨였다. 여성행사 게시판에 성형수술을 하고 싶은 이유 중 '자신감을 갖고 싶어서'라는 부분에 스티커를 붙인 뒤 노상에서 파는 옥수수 호떡을 사들고는 천천히 주위를 어슬렁거렸다. 어느새 내 손은 호떡에서 새어나온 설탕범벅이 되었고, 냅킨으로 급히 닦아내려다 오히려 휴지조각까지 붙이고 말았다. 근처 편의점에서 물티슈를 샀다. 손을 닦으면서 시계를 보니 약속시간이 지나 있다. 첫 인상은 시간약속에서부터 시작되는데 그는 벌써 점수를 잃고 있다. 그의 번호로 전화를 거니 굵직한 목소리가 받는다. 바로 앞에 서 있다고 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니 전화를 받고 있는 그 남자가 보였다.

그를 본 순간 그냥 뒤돌아서서 무작정 걷고 싶어졌다. 갑자기 급한 일이 생겼다. 미안하다.라고 말해버릴까. 그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발견했다. 낭패다. 이젠 어쩔 수 없다. 나는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그에게 다가갔다. 그에게 다가서자마자 담배진 냄새가 코를 찔렀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잠시동안 아무말도 하지 않고 나란히 길을 걸었다. 그가 뭐라 말을 한 것 같아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을 때 나는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랫니 부분에 있어야 할 이빨 몇 개가 보이지 않았다. 그는 강력계 형사라고 했다. 그러고보니 형사같은 체형이다. 두툼하게 벌어진 어깨와 짧고 굵은 다리로 성큼성큼 걷고 있는 그를 보며, 범인에게 맞아서 이빨이 부러진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입은 기성복 바지 뒷주머니 부분에 미싱자수로 수놓은 잎사귀가 있다. 팔에 걸친 쟈켓 왼쪽 가슴에도 똑같은 자수가 놓여져 있다. 그의 취향은 상상을 넘어선다.

점심때가 지난 시각이었기에 따로 식사는 하지 않기로 했다. 대신, 인사동을 거쳐 종로경찰서 쪽으로 향했다. 정문앞을 지날 때 유심히 안쪽을 쳐다보는 그를 보니, 그래도 직업인지라 관심을 가지는 모양이다. 그는 말주변이 없는 사람이었다. 오히려 그 쪽이 내겐 편했다. 범인을 취조하듯 이것저것 물어보는 내게 그는 단답형으로 대답했다. 연애경험이 있느냐고 물어보니, 잠시 걸음을 멈추고, 나를 이상한 듯 쳐다보았다. 당연히 있다고 대답한 뒤 다시 걷기 시작했다. 그와 사귀었던 여자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유도3단, 합기도 4단, 태권도 3단, 합이 10단인 그와 싸우려면 왠만한 용기가지고는 어림도 없으리라.

극장은 4층이었다. 함께 기다리는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뭔가 이상하다. 4층은 성인콜라텍이다. 한껏 멋을낸 아줌마들과 부자연스러운 표정을 지닌 중년 남자들이 의상을 들고 서 있다. 그 중 풍채가 좋은 중년남성은 화가 나서 왜소한 체격의 다른 남자에게 시비조로 말을 하고 있었다. 대화내용을 짐작해보면, 그는 콜라텍 분위기를 정리하는 인물이고, 다른 멤버들이 자신의 말대로 따라 주지 않은 것에 대해 화를 내고 있었다. 4층에서 내려 그들은 콜라텍으로, 우리들은 극장쪽으로 갈라졌다.

시골 변두리같은 극장이었다. 매점과 화장실이 있고, 로비에는 몇 개의 탁자와 의자가 놓여 있다. 몇 명의 관객이 앉아 있었으나, 혼자서 골똘히 생각하거나, 가만히 문밖을 응시하고 있다. 매점에서 음료수를 사들고 극장 현관 밖으로 나왔다. 한적한 극장과는 동떨어진 종로 한복판에는 많은 사람들이 분주히 오가고 있다. 엘리베이터에서는 여전히 수많은 주부들과 수상해보이는 남자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는 저런 곳에서 범죄가 발생한다고 했다. 형사 경력 10년인 그가 그렇게 말하니, 조금만 기다리면 특수기동대라도 출동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눈매는 잠복근무를 하듯 매섭다. 담배를 피우는 그의 입에서는 여전히 고약한 냄새가 난다. 도저히 그와 얼굴을 마주보고 대화를 할 수가 없다. 지나가는 말로 이야기를 해줄까.싶다가도 다시는 볼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에 그만 두기로 한다.

아이슬란드에 사는 천재소년의 성장통에 관한 영화는 몹시도 지루했다. 극장안에는 10명도 채 되지 않는 관객들이 있었다. 모두 혼자 앉아 있다. 서로 취향이 맞지 않는 한, 함께 볼 영화는 아니었다. 영화관을 나오면서 재미없었지요?라고 슬쩍 물어보자 지루하네요.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다지 미안한 마음은 들지 않았다.

해가 지고 있었다.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따라오고 있다. 잠깐 들를 곳이 있어서 먼저 가겠다고 하자, 그는 눈알을 굴리며 저녁을 함께 하자고 했다. 다시 시큼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밥을 먹는동안 휴지로 콧구멍을 막을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그냥 헤어지자고 했다. 그는 잠시동안 머뭇거리더니 뒤돌아섰다. 나 또한 뒤돌아 근처에 있는 서점에 들러 신간을 들춰본 뒤, 버스정류장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정류장 앞에는 돈가스 가게가 있었다. 갑자기 시장기가 몰려왔다. 혼자서 밥을 먹는 일은 익숙하다. 혼자서 영화를 보는 것 만큼 자연스러운 일상이다. 주문을 하고 수저를 들었지만, 생각과는 반대로 거진 남기고 말았다. 가게주인에게 포장해달라고 한 뒤,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갔다. 엄마는 네 주제에 경찰남편이면 얼마나 과분한 줄 아느냐고 소리를 질러댔지만, 나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포장해온 돈가스를 꺼내 깨끗이 먹어 치웠다. 이 후로 그에게 연락은 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