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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 발견

미친 리트머스

by iamlitmus 2007. 3. 26.
영화표를 예매했다. 인터넷을 이용하면 극장측과 연결이 된 온라인 예매가 가능할 뿐만 아니라 멤버쉽으로 인한 할인혜택도 주어지기 때문에 항상 이용하는 방법이다. 예약번호와 극장명, 시간을 적은뒤 수리를 맡겨놓은 MD를 찾기위해 남대문으로 향했다.

버스에서 내리려는데 바닥에 떨어진 지갑 하나가 눈에 띄었다. 종점에 가까운 정거장이었기에 사람들은 거의 없었고 아무도 그 지갑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길래 옳다구나 하고 집어들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아..내가 요즘 힘들 게 사는걸 보고 누군가 도와주려고 하나보다..그랬다.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지갑을 열어보니..아니..이럴수가.. 그래도 명색이 서울의 쇼핑 메카인 명동에 오면서 달랑 5천원을 들고 오다니... 도대체 너의 정체가 무엇이냐 싶어 신분증을 보니 D여대 약학과랜다. 그뒤에 감춰진 식권 2장. 처절한 그녀의 삶이 느껴졌다. 간신히 연락처 비슷한 것을 찾아내 전화를 하니 화들짝 놀란 여자애의 목소리가 튀어나온다. 근처에서 만나기로 하고 시계를 보니 예매시간인 3시까지 얼마남지 않았다. 귀찮다는 생각마저도 들었으나 지갑을 받아든 모녀가 기뻐하는 것을 보니 뭐 그다지 나쁘지는 않다.

서울극장앞에 다다른 것이 영화상영 15분전. 표를 사기 위해 대로변까지 늘어선 인파들을 헤쳐 나가며 있는 힘껏 그들의 나태함을 비웃어주었다.
주말에 예매도 하지 않고 극장에 오다니..바보들..나처럼 이렇게 미리미리 준비했어야지. 그러니까 수족이 고생하는거야.
의기양양하게 지갑에서 예약번호를 적은 종이를 꺼내들고 교환창구로 향하던 나는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예약번호 1234567
/시티극장 15:00(3회) 10층 나열 345

한참을 들여다보고 있자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어이가 없었다. 아..내가 이제 이지경까지 오고야 말았구나. 뇌의 언어회로와 시신경의 불일치가 만들어낸 지상 최대의 이벤트였다. 서울극장에서는 아예 그 영화는 상영하지도 않고 있었다. 자책은 뒤로 미루기로 하고 우선, 해당극장에 전화를 걸어 예매취소를 요구했으나 상영 5분전에는 불가능하다는 냉랭한 대답이 돌아왔다. 재차 부탁했으나 그녀는 공산당이 싫다고 외치다 입을 찢긴 이승복 어린이마냥 같은 소리만 계속 반복해댔다. 방법을 바꿔 티켓예약사이트에 전화를 거니 남자직원이 받는다. 남자라면.. 승산이 있다. 그도 처음에는 난색을 표했으나 내가 주운 지갑을 주인에게 되돌려줄정도로 착하다는 것에 감동을 받아 매출취소를 해주었다. 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얼마전부터 마치 방언을 하듯 육체와 정신이 따로 놀기 시작했다 . 이건 건망증을 넘어선 다른 종류의 광기였다.  머릿속에서는 분명히 인지를 하면서도 수족이 하는 행태는 머리잘린 산낙지마냥 제각각이다.  누가 물어보면 귀신 씌웠다고 해야지 싶을 정도로  당황스럽고 무안하다. 항상 종이와 펜을 가지고 다니며 메모를 하고, 바짝 긴장을 하고 딴 생각을 하지 않도록 정신을 집중하다보니 하루종일 피곤스러워 말 그대로 미칠 것만 같다.
가정불화가 있는 것도 아니고 교우관계가 나쁜 것도 아닌데 왜 이러는 걸까. 남부끄러워 누구에게 털어놓을 수도 없고 악성종양 양성결과를 받아든 것마냥 막막하고 무섭기까지 하다.

진짜..겁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