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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oday's..

백수가 되었다

by iamlitmus 2021. 11. 4.

지난 8월부터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왕복 2시간이 넘게 걸리는 여의도였지만, 전부터 아는 업체가 진행하는 거였고, 익숙한 업무파트였던지라 쉬는 기간 없이 곧바로 출근을 했다. 

 

그러나, 투입된 지 한 달 여가 채 지나기도 전에 이슈가 하나둘 드러나기 시작했다. 2개월이 지날 즈음엔 하루라도 빨리 발을 빼야겠다는 결심을 굳힐 정도로 엉망이 돼가는 것이 눈에 보였다.

짧지않은 고민 후 계약업체 대표에게 남은 한 달 동안 내가 맡은 파트를 마무리하고 나가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예상은 했었지만, 어르고 달래는 대화가 오고 갔다. 욕먹을 각오는 되어 있었기에 단호하게 나가겠다고 재차 말했다.

 

도대체 이유가 뭐야?

의사를 밝인 이후, 제일 처음 받는 질문이었고, 하도 반복해서 말하다 보니 문서로 만들어야 하나 싶었다. 

가장 큰 원인은 사람이었다. 나와 함께 투입된 PM은 금융 프로젝트 경력이 전무했다. 금융사에서도 힘들기로 소문난 S은행 프로젝트는 알아서 일해야 한다는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처음에는 먼저 알려주기도 하고, 대신 처리해주기도 했지만, 듣는둥마는둥했다. 그 후로도 달라진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악하지는 않지만, 일을 너무 못하는 사람이었다. 나중에는 헤매는 모습을 봐도 그냥 모른 척했다. 

 

두 번째는 같이 일하는 기획자였다. 투입된 지 두 달이 지났는데도 설계 1장도 나오지 않았다. 요건 정의가 되지 않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일의 우선순위를 모르는건가 싶었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그냥 쉬운 것만 하고 싶어하는거였다. 새로운 메뉴가 튀어나올 때마다 당연한 듯 내가 맡게 되었고, 전체가 100장이라면 80장이 내 몫이 되었다. 인정 욕구는 강한데, 일을 못했다. 자신에게는 너그럽고, 타인에게는 함부로 하는 모습도 혐오스러웠다. 

 

세 번째는 개발팀의 실력 부재였다. 난이도가 높고, 개발범위가 늘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제대로 분석조차 하지 않고, 무조건 나만 쳐다보며 해결하려는 태도가 답답했다. 게다가 같은 질문을 몇 번이고 반복하고, 너무나 기초적인 것조차 이해를 못하는 개발 PL의 실력도 의심스러웠다. 

 

나머지는 수행사 대표들의 안이한 영업방식, 턴키로 계약했으니 알아서 책임지라는 갑질 행태 등 전체적으로 관리가 되지 않는 상황에 스트레스는 극에 달했다. 나만 힘들면 모두가 행복하니, 네가 참아라. 식의 태도에 화가 났다. 내가 없어져봐야 너희들이 일을 하겠구나. 싶은 분노가 치밀었다. 

 

간신히 대체 인력 투입 일정이 정해졌다. 듣자 하니 이전 프로젝트에서 그다지 인정을 받지 못했던 사람 같은데, 부디 내가 나갈 때까지 버텨주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여전히 회의 때마다 고성이 오갔고, 상처를 주는 칼날들이 난무했지만, 남은 출근일을 세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계약사 대표는 나중에 꼭 다시 보자며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난 그녀가 내가 나가기 전까지 할 수 없는 업무까지도 시켜야 하지 않겠냐고 PM에게 요청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드디어, 철수일이 되었고, 퇴근 전까지도 미친 듯이 업무를 처리했다. 사무실을 나와 베키를 타고 집으로 향하는데 너무 좋아서 저절로 웃음이 났다. 탈출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동안 내가 얼마나 괴롭고 불행했는지 새삼 깨달았다. 해방기념으로 미대오빠와 외식을 했다. 못 마시는 소주를 마시는 동안 너무 행복하다는 말이 계속 튀어나왔다. 

 

올해는 아무 것도 하지 말자.

번아웃당한 멘탈을 회복해야 한다. 

내가 건강하고 행복한 것이 최우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