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생활의 발견

이 부부가 사는 법

by iamlitmus 2007. 3. 26.
인터폰이 울렸다. 1층 현관의 모습과 함께 아빠의 모습이 비쳐들었다.
/차 어디다 놔뒀어? 아무리 찾아도 없다.

10여일전 지숙네 집인 양평에 가느라 차를 썼었는데 정확히 어디에 주차를 했는지는 명확치 않다.
/지하..3층 쯤일껄?

잠시후 다시 인터폰이 울렸다. 엄마였다.
/너 차 어디다 둔거야? 아빠가 못 찾잖아.

결국 직접 내려가서 찾아야만 했다. 그런데..샅샅이 뒤져도 고물자동차는 보이지 않았다. 어허..이럴수가..
최근들어 부쩍 심해진 건망증 때문에 혹시 내가 기억을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어 곰곰히 생각을 해봐도 지난 일주일간은 학교에서 하루종일 지냈기 때문에 차를 쓴 적이 없다는 데에 확신을 걸었다.

이제..혐의는 아버지에게로 옮겨갔다.
/아빠, 마지막으로 차 쓴게 언제야?
/나 안썼다. 전혀 안썼어.
/나도 안 썼는데..진짜야? 기억 못하는거 아냐?
/아냐..진짜 안썼다. 차..누가 훔쳐갔나보다..큰일났네..
/그렇게 후진 차를 누가 훔쳐가..팔아도 100만원도 안 나올껄.

경비아저씨가 다가와 누가 훔쳐갔을리가 없는데..이상하다며 고개를 갸웃거리셨다. 아빠는 분명히 누군가의 소행이라며 부실한 경비체제를 비난할 준비를 취하셨다. 그러나..엄마도 나도 제3자가 개입되었으리라고는 절대 생각하지 않았다.

/엄마, 마지막으로 차 쓴게 언제야?
/음..지난 월요일..삼촌네 갔었지.
/뭐야..그럼 이번주 내에 쓴거잖아.(휴..최소한 나는 아닌것이다.) 아빠는 왜 기억을 못해?
/모르겠다. 정말..왜 그러는지..

집에 들어와 있으려니 인터폰이 울렸다. 아빠였다. 차를 찾았댄다.

흥분한 엄마말에 의하면 며칠전 아빠는 등본을 떼러 동사무소에 갔다가 차를 두고 오신거였다. 왜 그냥 돌아오셨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렇듯 까맣게 잊어 먹고서 엉뚱한 곳에서 찾아댔으니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나까지 도와줄 필요는 없다 싶어 아무말도 하지 않고 있으려니 집안 분위기 볼만 해진다. 이윽고 내가 우려했던 사태 발생, 불똥이 나한테 튀기 시작한 것이다. 아무말도 안하고 거실에서 TV만 보고 계신 아빠가 너무나 얄미웠다. 자신의 기억력 부재에 충격을 먹었을 아빠의 마음이 전혀 고려되지 않는건 아니지만 언제까지 내가 이들 부부의 해우소가 되어야 한단 말인가.

저녁식사시간, 엄마는 깨끗이 씻어놓은 배추가 너무 달다며 기뻐하신다. 식사하시라고 아빠를 부르니 건성어린 대답이 들려온다. 벌써 4시간이 넘게 인터넷 바둑을 두시는 아빠였다. 난 엄마의 기쁜 마음이 금새 돌아설까봐 맘이 조마조마해졌다.  

이윽고, 엄마와 내가 식사를 끝내고 물을 마실 때 쯤에야 식탁에 다가와 앉는 아빠. 솔직히 말하면, 난 그때까지도 아빠가 참 얄밉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엄마는 마치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이것저것 반찬을 집어서 아빠에게 내밀며 웃음섞인 농담을 건네시는거다. 오히려 고개조차 들지 않고 아무말없이 그릇을 비워내기만 하시는 아빠가 더 화를 내신다는 느낌이 들었다.

잠들기전 출출하시다며 만두를 튀겨 오라는 엄마의 엄명이 떨어졌다. 아빠는 아직도 목석같은 사내인채로 TV화면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계셨다.
/아빠는 녹두부침을 데워서 드려라. 음료수랑 함께.
/엄마는 화도 안나? 뭐가 그리도 이뻐?
/이뻐서 그러겠냐. 그래도 그러는게 아냐. 정성스럽게 해서 드려.

순간, 나와는 상관없는 당신들만의 특별한 관계가 느껴졌다.
내가 끼어들 여지가 없는, 그들만의 당연하고도 익숙한 흐름.
아..이래서 '부부'라고 하는 거구나..'부부'니까..이럴 수 있는 거구나..
어이가 없기도 하고 안도감같은것이 들기도 하고..어쨌든 이해하기 힘든 느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