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Today's..

볼보와 약속하다

by iamlitmus 2024. 4. 2.

미대오빠는 그랜저XD(2001년)를 13년째 타고 있다. 세월의 흔적이 있기는 하지만 한달에 1~2번 정도만 타는지라 2만 킬로도 타지 않은 새차같은 헌차다. 시내에서는 대부분 대중교통을 이용하고 교외로 나가는 일은 거의 없다. 어딘가 가고 싶은데 싫다 하면 그냥 나 혼자 가면 된다. 그런 그가 차를 사기로 마음먹은 이유는 어머님이 쏘아 올린 공이었다. 

/아들아. 나도 좋은 차 타고 싶다. 

 

얼마 전, '아들아! 나도 안방에서 큰 TV로 보고 싶다.'라는 말에 LG 올레드 75인치를 바로 구입해준 효자 아들에게 이번에도 주저함 따위 있을리 없었다. 바로 G80모델을 알아보고 있는데(어차피 차를 사더라도 내가 탈 일은 거의 없기 때문에 관심없었음.) 마침 볼보 S90 시승 기회가 생겨 목동 전시장을 방문했다. 입구에 들어서자 영업 사원 몇 명이 카운터에 서 있었는데 올리브영이나 편의점에 들어갔을 때 보내주는 그런 무심한 시선과 부딪혔다.

 

담당직원이 자리에 없다고는 하는데 그동안 간단하게 나마 상담을 해줄 것을 기대했지만 음료와 스낵을 제공받은 뒤에도 멀뚱히 앉아 있었다. 아마도 그냥 시승만 할 고객들이라고 여기는 것 같았다. 통창으로 햇빛은 쏟아 들어오지, 히터를 틀었는지 공기는 뜨겁게 달아오르지, 직원들은 무관심하게 잡담하고 있지, 나름 주말에 일부러 시간내서 왔는데 이런 상황 자체에 점점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혹시 가격 관련해서 먼저 상담 받을 수 있을까요?

미대오빠가 직원 데스크 쪽으로 물었으나 그들은 듣지 못한 것 같았다. (미대오빠는 나한테만 큰 소리를 내지, 다른 사람한테는 거의 말을 걸지 않거나 하더라도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저기요!

나는 목소리가 크다. 그리고, 벌써 마음이 멀어지고 있었다.

 

가격 상담을 받고 싶다는 말에 남자 직원이 다가와 태블릿을 이리저리 찍어가며 설명해주는데 인터넷으로도 확인할 수 있는 수준의 내용이다. 그냥 갈까 싶은 순간 담당 여직원이 다가왔다. 자동차를 구매하신 고객을 배웅하느라 늦었다며 사과하는데, -1점. 믿기지 않는 영업멘트다. 굳이 할 필요없는 말을 한다고 느꼈다. 30대 초반 정도 되보였는데 자신도 28살때부터 S90 모델을 타고 있다고 했다. 8천만원 짜리를? 하긴 요즘 젊은 사람들은 대출을 두려워하지 않으니까, 그리고 영업을 하려면 판매모델에 대해 잘 알 필요도 있으니까. 

 

전시장 근처 3킬로 내외로 시승을 했다. 내게 있어 자동차는 단순히 탈 것 이상이 아니기 때문에 아..달리는구나, 스피커는 이렇구나, 뒷 좌석이 넓네. 천정이 열리니까 환기 시킬 때 좋겠다. 정도의 생각만 들었다. (자동차를 구입한다면 소형차 중고 또는 다마스 중고를 생각하고 있음)

 

다시 전시장으로 돌아와 구체적인 상담을 받았다. 카드결제를 하는 경우 영업사원이 수수료를 부담하기 때문에 현금 결제를 하는 대신 수수료만큼 썬팅이나 블랙박스 등의 서비스를 해준다고 한다. 지금 계약하면 이것저것 옵션을 챙겨줄 수 있지만 다음 달로 넘어가면 혜택이 없어질 수도 있다는 말을 하는 순간 -10점. 홈쇼핑 마냥 재촉하는 것이 싫었다. 

 

며칠이 걸릴 지는 모르겠지만 충분히 고민하고 생각하자. 그래도 꽤 긍정적인 마음으로 전시장을 나왔다. 그런데, 이후 영업사원이 계속 문자를 보내왔다.

'딱 1대 남았어요. 지금 안하시면 계약하시기 힘들어요.'

'언제쯤 결정되실까요?' 

-50점. 재촉하지 말라고.

 

미대오빠는 차를 사는 사람은 자기인데 왜 너한테 그런 연락이 오는거냐고 했다.

/딱 봐도 내가 결정권을 갖고 있는 것 처럼 보이겠지.

 

저녁산책을 하면서 미대오빠가 고백하듯 말했다.

/나 S90 살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