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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 발견

문창과 수업 발표

by iamlitmus 2007. 3. 26.
이제까지 꿈꿔왔던,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순간을 묘사하시오.

그는 아직도 깨어나지 않고 있다. 새벽녘이 되어서야 들어온 그의 얼굴은 몹시도 지쳐보였다. 매달, 마감을 치룰 때마다 그는 힘겨워했다. 그러나 동시에 기꺼이 행복해했다.

정오가 훨씬 지난후에야 그는 모습을 나타냈다. 언제나 단정하게 손질되어 있던 그의 머리는 제멋대로 헝클어져 있었고, 몹시도 구겨진 파자마는 그의 잠버릇을 짐작케 했다.

그는 거실에 앉자마자 TV스위치를 켠다. 기계치인 그에게 유일하게 친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TV 리모컨이었다. 그는 쇼핑 채널도 좋아한다. 아마도 그는 쇼핑호스트들의 능수능란한 언변에 놀아나는 유일무이한 남자일 것이다.

그는 배가 고프다고 했다. 뜨거운 것을 싫어하고 신김치만 좋아하는 그의 식성을 맞추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점점 불어나는 그의 살집을 눈여겨보면서도 자꾸만 먹이고 싶은 맘이 드는 그녀였다. 통통하게 살찌워 5일장에 내다 팔 것도 아니면서, 이것저것 그의 앞에 밀어 놓는다.

그는 자신의 물건, 특히 서재안의 책들에 대해서 유달리 애착을 가지고 있었다. 거기에 덧붙여 남들이 버린 책들마저 주워다 놓는 통에 지금은 발들여 놓을 틈도 남아있지 않은 상태였다.

며칠을 조른 끝에 오늘만은 서재정리를 하기로 약속을 해놓은 터였다.  오랜만의 둘만의 외출을 헌책방으로 정한 것이다.
이건 안되는데..저건 정말 안되는데..그의 중얼거림을 무시하고 그녀는 매몰차게 책들을 들어냈다. 어린아이 키만큼 쌓인 책들이 현관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홍대 정문앞 헌책방은 그와 자주 들렀던 곳이다. 우리는 안면있는 서점주인과 간단한 눈인사를 나눈뒤 그의 앞에 거창하게 책을 부려놓았다.
그는 아까와는 달리 자신의 분신과도 같았던 책들에 대해 열심히 설명을 해나갔다. 그의 목소리엔 체념어린 아쉬움과 함께 희미한 자부심마저 묻어났다.

2만원이란 돈이 우리의 손에 쥐어졌다. 무엇을 할까 잠시 고민해야만 했다.
최근 개봉한 영화를 볼 수도 있었고, 때늦은 점심을 사먹을 수도 있었다. 아니면, 빨간불이 들어오기 시작한 자동차를 위해 주유소로 가야만 할지도 몰랐다.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한참을 두리번 거린 후에야 헌책방 구석에서 그를 발견해낼 수 있었다. 아예 자리를 잡고 앉아있는 그의 손엔 조그만 시집이 들려 있었다. 기쁨에 들떠있는 그의 눈빛을 마주한 그녀에게 그들의 2만원이 어떻게 쓰여질지 예감되었다.

집으로 향하는 가파른 언덕배기를 오르는 그들의 양손엔 누렇게 색이 바랜 일본문학전집 10권과 중국 당시집 2권이 들려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