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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 발견

문창과 실기과제

by iamlitmus 2007. 3. 26.
k는 커피자판기 앞에 섰다. 익숙치 않은 자판기 얼굴이 성큼 다가왔다. 쏟아져 내린 원두 더미 한가운데, 크림 빛 커피 잔이 놓여져 있다. 블랙인 듯 싶은 커피 사진에서는 몇 가닥의 연기가 그어져 있다. 그러고 보니 커피 향이 나는 듯도 싶다.

k는 바지 주머니 속으로 손을 집어넣어 몇 개의 동전을 움켜쥐었다. k는 그 중의 한 개를 주입구에 밀어 넣었다. 미끄러지듯 빨려 들어간 동전은 가벼운 마찰음을 냈다. 아무런 변화가 없다. k는 한 개의 동전을 더 밀어 넣었다. k의 손가락을 떠난 동전이 어딘 가로 떨어졌음에 틀림없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반향이 가시기도 전에 일순간 모든 버튼에 불빛이 비쳐들었다. k는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첫 번째 버튼을 힘껏 눌렀다. 버튼이 제자리로 돌아오기도 전에 '딸깍'하고 종이컵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k는 머릿속으로 분주함을 감추고 있는 자판기의 내부를 가늠하기 시작했다. 투명한 통에 담겨져 있는 커피와 프림, 그리고 설탕이 차례대로 덜어진 다음 뜨거운 물이 부어질 것이다. 아니, 순서가 다를 수도 있다. k는 몇 번이고 이들의 순서를 바꿔나갔다. 그러면서도 불투명한 아크릴 뚜껑 위의 깜빡거림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숨가쁘게 깜빡거리던 불빛은 어느 한 순간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k는 고개를 숙여 컵이 들어 있는 어두운 구멍을 들여다 보았다. 아직도 몇 방울의 커피가 떨어지고 있는 것이 보였다. k는 뚜껑을 열고 조심스레 손을 밀어 넣었다. 둥그런 틀에 고정되어 있는 컵이 손에 닿았다. 손목에 힘을 주자 가볍게 컵이 떨어져 나왔다. 컵은 손바닥으로 감싸기에는 너무나 뜨고 손가락 끝으로만 지탱하기에는 지극히 불안했다. k는 얼른  손수건을 꺼내 컵을 감싸쥐었다.

컵 주위로 부주의하게 튀어 붙은 커피방울이 맺혀 있었다. k는 그제서야 허리를 펴고  컵 속을 자세히 들여다 보았다. 커피는 소용돌이치는 프림 자욱을 감추려 애쓰는 중이었다. k는 자판기 옆 계단에 걸터 앉았다. 하마트면 컵을 놓칠 뻔 했으나 다행히 엎지러지지는 않았다. k는 천천히 종이컵을 입가로 가져갔다.

뜨거운 열기가 훅 끼쳐왔다. k는 잠시 머뭇거린 후, 조심스레 입술을 컵의 가장자리에 댔다.
반모금 정도의 커피를 입에 흘려넣자 지독한 단맛이 느껴졌다. k는 얼굴을 찡그렸다. k는 고개를 들어 자판기를 노려보았으나 자판기는 딴청을 피우듯 여전히 원두더미 속의 커피잔만 들이댈 뿐이었다.

k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k는 계단에서 몸을 일으켰다. 아직도 반 이상이나 남은 커피가 심하게 요동을 쳤다. k는 자판기 주변을 두리번 거렸으나 커피가 담겨있는 채로 버릴수 있는 곳은 눈에 띄지 않았다. 이미 미적지근해진 커피는 비릿한 내음마저 풍기고 있었다.

k는 갑자기 참을수 없는 구토감을 느꼈다. k는 황급히 컵을 감싸고 있던 손수건을 벗겨내어 입을 틀어 막았으나 어느새 짙게 배어버린 커피내음은 그의 토악질에 한층 더 힘을 실어주었을 뿐이었다.
손에서 미끄러진 컵은 바닥으로 떨어지며 불규칙한 갈색 파문을 흩뜨려 놓았다. k의 바지와 신발에까지 튀어오른 커피자욱은 점점 더 짙은 색으로 바뀌고 있었다.

k는 잠시 숨을 고른 후 아직도 바닥에서 구르고 있는 컵을 집어 들었다. 아무것도 담겨있지 않은 종이컵은 이미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있었다. k는 컵을 아무렇게나 움켜쥐었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마냥 그것은 금새 오그라들었다.

한손에는 종이컵을 움켜쥔 채, 그로부터 도망치듯 점점 더 번져가는 갈색 얼룩의 흐름가에서, k는 그렇게 한참동안이나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