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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 발견

발가락이 닮았다

by iamlitmus 2007. 3. 26.
오늘만해도 2번이나 아버지랑 다투었다. 요즘들어 자주 일어나는 일이다.

책의 반납기한일이 오늘이었다. 패기좋게 빌려놓고 한권도 마저 읽지 못한 나의 게으름에 진절머리가 나기도 했고, 30분을 기다려 마을버스를 타고 15분이상을 걸어 학교도서관에 간다는 것도 너무나 귀찮았기에 차를 가져가기로 했다.

그러나..지하1층부터 3층까지 휘돌아쳐도 차는 보이지 않았다. 인터폰을 눌렀다.
/42평짜리 주차장에 있다.
/뭐라구? 그게 어디야?
/42평짜리라니까...
/도대체 어딜 말하는거냐구..

뚝..끊김...
아버지는 항상 그랬다. 전화를 걸 때도 자신의 할말만 하고 끊어 버린다. 내려올줄 알고 한참을 기다렸지만 저만치 보이는 엘리베이터의 숫자는 움직일줄을 몰랐다. 현관문을 열었을 때 아버지는 TV바둑을 보고 계셨다.

/똑바로 말을 해줘야 하잖아. 왜 혼자만 아는데다가 주차를 하냐구..
/내가 몇 번이나 말해줬잖아. 그렇게 똑똑한 척 하는애가 왜 못알아들어?

책을 반납하고 돌아 나오는 길..맘이 불편했다. 공중전화카드를 꺼냈다.
/나야..
/...
/화났어?
/또..왜..
/아까..신경질내서 미안해. 지금 갈께..
/..그래.

상대방이 사과를 하면, 금새 풀리는 성격.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중의 하나이다.


매일 저녁, 옥장판을 틀어놓고 온식구가 모여앉아 TV를 보는데, 특히, 엄마는 이런 분위기에 무척 흡족해하신다.
은행강도사건, 총포상 살해사건 등 같은 뉴스를 몇 번이나 본지라 다른 채널로 돌리려는 순간 아버지의 분노섞인 외침이 뒤따랐다.

/왜 네 맘대로 채널을 돌리는거야?
/아까..다 본 뉴스잖아.
/싸가지 없이..항상 자기 내키는 대로 행동하구 말야...

마음속 깊은 곳에 담아두었다가 엉뚱한 때, 한꺼번에 터뜨리는 것..그것 또한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았다.

이뿐만 아니라, 너무나 귀가 얇아서 항상 다른 이들에게 이용당하는 것, 상대방의 사소한 한마디를 몇날 며칠동안 곱씹어보는 것, 하루에도 열두 번도 넘게 기분이 바뀌는 것, 죽어도 미안하다는 말은 못하는 것..들도 아버지로부터 물려받고 말았다. 저주받을 주근깨와 새가슴을 물려받은 것도 모자라, 성격까지 똑같이 대물림받은 터라 어딜가나 아버지의 판박이로 알려질수밖에 없었다. 이런 내 성격이 싫어 무던히도 바꾸려고 애를 썼건만, 결정적인 부분에서 튀어나오는 정직한 유전공식은 정말이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내일은 아침부터 만두를 빚기로 했다. 엄마와 내가 몇시간째 쭈그리고 앉아 밀가루와 씨름하는 동안 아버지는  언제나 그러셨듯이 신문을 보시거나 낮잠을 주무실테고, 다 만든뒤 식탁에 차려 놓으면 그제서야 다가와 앉아 맛의 품평을 하실 것이다.

우리 아버지는..아마도 영원히 바뀌지 않으실 것이다. 그리고, 나 또한 바뀌기는 힘들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