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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 발견

내 탓이 아냐

by iamlitmus 2007. 3. 26.
수리를 맡긴 카메라를 찾기 위해 신설동에서 내려 수도학원 근처를 지날 때였다. 펼친 우산 속으로 냉큼 들어서듯 한 남자가 내 옆에 다가와섰다. 나와 보조를 맞춰 걷고는 있었지만, 돌린 고개저편으로 히죽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순간, 잊고 있었던 불쾌한 예감이 되살아났고 미처 맘을 추스리기도 전에 있는 힘껏 그를 증오하기 시작했다. 걸음을 멈춰선 나는 그를 죽일듯 노려보았고, 움찔거린 그 남자는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다. 뒤따라오던 일행인듯 싶은 두명의 남자들이 웃음을 터뜨려댔다.

초등학교때부터 키가 컸다. 아침조회시간, 다른 아이들이 자로 잰듯 줄맞춰 정렬한 뒤 맨 마지막에 서기만 하면 되었다. 중학교때는 1년마다 10센티가 넘게 쑥쑥 자라났다. 88 꿈나무도 아닌데 이런 신체 변화가 달가울리 없었다. 교내 체육대회에서 혁혁한 공이라도 세웠으면 좋으련만, 이도저도 아닌 젬병의 운동감각으로 인해 키큰애는 싱거운 애라는 소리를 들어야만 했다.
고등학교때 이미 170을 넘어버린 나는 브룩쉴즈의 지병인 '거인병'에 대한 공포감에 싸여 지냈다. 친구들은 속도 모르고 무한히 부러워했다. 어떻게 하면 너처럼 키가 클수 있니? 할수만 있다면 발목이라도 자르고 싶었던 내게 그 질문은 까진 상처에 소금 뿌리는 격이었다.

길을 걷다 보면 뒤에서 수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와~, 키 진짜 크다.' 이건 그나마 양호한 케이스. 일행중 한명이 쪼르르 달려나와 내옆에서 겅중댈때는 목을 조르고 싶었다.
남들의 시선을 끄는 것이 싫었다. 하이힐은 커녕,멀쩡한 구두굽을 톱으로 잘라내서 신고 다녔다. 키가 클까봐 기지개도 마음대로 켜지 못했다.

매스컴에서 슈퍼모델대회가 성황리에 개최되었다. 온국민의 염원은 통일이 아니라 키크는 것이었다. 키크는 약, 키크는 수술, 키크는 운동, 키크는 음식 등이 한반도를 뒤덮었다. 이왕 커버린것 뻔뻔해지기로 맘 먹었던 내게 있어서 이 시기는 대한독립만세였다.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세상이 남달라 보였다. 물론, 나를 처음 대하는 이마다 휘둥그레지는 시선은 여전했지만, 이미 그들은 나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하지만, 오늘같은 일을 당할때면 나도 모르게 예전의 상처가 후벼지고 만다.

키가 큰것은 내 탓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