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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 발견

봄날

by iamlitmus 2009. 12. 30.
소심해씨는 한참동안 손거울을 들여다보다 미간을 찌푸린다.
반원을 그리듯 이마에서부터 옆머리까지 흰눈이 소복히 앉아 있다.
요즘 중년치들은 연탄처럼 새까만 흑발을 멋드러지게 빗어올리고 다니지만,
염색할때마다 며칠동안 간지러워 고생했던 기억이 떠올라 고개를 내젓는다.
내 눈에 보이지 않으니 그닥 신경쓰이지는 않았는데
어제 나갔던 모임에서 제일 연장자 취급을 받고 보니, 초간마다 흰머리가 늘어나는 것 같아 여간 성가신 것이 아니다.

/나 염색 좀 해줘
퉁명스런 소심해씨의 말에 TV를 보고 있던 아내가 고개를 틀어 본다.
/왠일이래? 내가 그렇게 하자고 해도 싫다고 하더만.
/잔말말고 약이나 사와.

오랜만에 모임에 나간 소심해는 미실의 가채가 부럽지 않을만큼 윤기 흐르는 검은 머리에 온 신경이 쏠려있다. 
빈 젓가락을 집었다 놓았다 하며 건너편에 앉은 김여사의 눈치를 살피던 그는 그녀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다는 사실에 펄쩍 놀라 자세를 고쳐 앉는다.
/소사장님, 오늘따라 젊어보이세요.
/아..네..흠..흠..
/염색하셨나? 진작 좀 하시지 그러셨어요. 훨씬 낫네요.

/소사장도 김여사에게 잘보이고 싶은가보지요.
옆자리에 앉아 있던 이영감이 냉큼 말을 넘겨받아 빙글거린다. 느물거리는 폼이 낙지를 배배 꼬아 불판에 올려놓은 것같다.
허리띠를 풀고 앉아 상추쌈을 우겨넣고 있던 최영감도 눈을 희뜩거리며 소심해씨를 쳐다본다.
소심해씨는 진땀때문에 검은 물이라도 뚝뚝 흘러내릴 것 같아 조바심이 난다.
/아니..뭐..원래 이랬는데..새삼스럽게..흠..흠..
/어제는 탑골공원이라도 가야 할 것 같더만, 지금은 새신랑 같네..음하하핫.
자신을 두고 왁자지껄 떠드는 자리가 불편했지만, 생글거리는 김여사의 얼굴을 보니 염색하길 잘했다는 생각부터 든다.

입에서 호빵통같은 연기가 뿜어져 나오면서도, 김여사에게 입고 있던 코트를 어깨에 걸쳐 주는 소심해씨의 얼굴은 발그레하다.
/괜찮으세요? 감기라도 걸리시면 제가 너무 미안해져서..
/아..아닙니다. 원래 추위를 잘 안타는데요 뭐.
매일 냉수마찰을 한다고 하려다 나라도 믿지 않을 것 같아 꿀꺽 말을 삼킨다.
드림랜드 놀이공원 대신 서울공원이 들어섰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이는 김여사였다.
아내에게 말해봤자 날 추운데 쓸데없이 가긴 어딜가냐고 퉁퉁 댈 것이 뻔했기에, 말조차 꺼내지 않았다.
새로 심은 나무들은 아직 자리를 잡지 못해 앙상한 회초리들을 박아 놓은 것만 같았지만,
김여사와 오롯이 걷는 좁은 숲길은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따뜻한 봄날같다.
저만치 새로 지은 듯한 깔끔한 매점이 눈에 잡힌다.
따뜻한 찻잔을 건네는 자신의 손과 겹치는 김여사의 고운 손이 떠올랐다.
잰 발걸음으로 도착한 매점 창문 너머로 한 무리의 일행들이 자리를 잡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눈가에 양손을 대고 안쪽을 들여다보았지만, 김이 서린 탓에 희끄무레한 사람들의 형태만 눈에 잡혔다.

/커피는 제가 살께요.
뒤에 선 김여사가 그의 등을 살짝 미는 기색이 느껴졌다. 다리미를 등에 댄 듯 깜짝 놀란 소심해씨는 엉겁결에 떼밀려 매점 안으로 들어셨다. 일순간 조용해진 매점 안에서 누군가가 황급히 등을 돌려 앉는 것이 보였다. 눈에 익은 겨울점퍼와 항상 현관에 놓여있던 보라색 모자가 자신을 등지고 앉아 있다.
/커피 두 잔 주세요.
주문하는 김여사의 옆에 선 소심해씨는 주머니에서 마스크를 꺼낼까하다 손가락만 꼼지락거렸다.
그의 팔꿈치를 살짝 잡아당기는 김여사의 눈꼬리에 담긴 애교질을 보면서도 자꾸만 한 쪽으로 신경이 쏠렸다.
/자리도 없고, 답답하니 밖에 나가 걷는 것이...
/어머나..사장님, 잠시만요..
김여사의 대답을 듣기도 전에 밖으로 나선 소심해씨의 가슴은 그제서야 두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다.

그날 저녁, 아내의 눈치를 살폈지만,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는 것이 더욱더 불안해지는 소심해씨였다.
차라리 평소처럼 퍼부어대기라도 하면 좋으련만 설겆이를 끝낸 후에도 아내는 평소와 다를 바없이 등돌리고 앉아 TV를 보고있다.
'그래, 남자가 사회생활을 하다보면, 여러 사람을 만날 수도 있는거고, 내가 뭘 그리 큰 잘못을 한 것도 아니고..'
어느 사이엔가 가슴이 단단해지고 뱃심도 생기는 듯 하더니 금새 잠에 빠져든다.

다음날 아침, 아내가 청소기를 돌리는 소리에 시계를 쳐다보니 아침도 한참이나 지난 시각이었다.
어제 하루종일 추위에 떨고, 솥뚜껑보고 놀랜 가슴에, 바짝 긴장까지 하고 보니 항상 새벽에 눈을 뜨던 습관이 어긋난 모양이다.
자리에서 일어나 앉으려는데 김가루같은 것이 가슴팍으로 우수수 떨어진다. 눈을 꿈뻑여가며 한참 들여다보던 그는 손을 들어올려 앞머리를 쓰다듬었다.
뭔가 까끌거리기는 하는데, 이상타 싶어 침대머리맡에 놓여있던 거울을 갖다대자 그곳에는 추수를 반만 끝낸 벌판 마냥 앞머리만 싹둑 짤려 나가 있었다.
/이..이게...뭐..
소리를 지르려다 말고, 다시 거울을 들여다 보고 앉아 있는데, 아내가 지나치며 한마디 한다.
/봄날 올때까정 아무데도 못가겄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