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 들어온 그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꼈다. 어디선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온 것도 그때였다. 조심스럽게 안방문을 여니, 이불을 뒤집어쓴채 울고있는 엄마의 조그만 몸집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문을 닫고 나와, 냉장고에서 우유를 꺼내 한잔 가득히 따라 마신 후, 잠시 그대로 서 있었다. 어느 사이엔가 그의 곁에 서있는 엄마의 눈은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
병원에 입원하겠다고 먼저 말을 꺼낸 것은 아버지였다. 시간마다 소주병을 비워나가면서도 가족들에게 주정을 부린다거나 화를 내는 법없이 조용히 잔을 거듭할 뿐이던 그에게도 어떤 위기감이 느껴졌던 것일까. 이미 오래 전부터 사형선고나 다름없는 진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연거푸 술잔을 들이키는 그를 지켜보던 가족들은 그저 방관자들일 뿐이었다. 그렇게 마실거라면 같이 먹고 죽어보자며, 아버지앞에서 병나발을 불기도 했었다. 아버지는 그런 그를 무시한채, 새 병을 가져와 말없이 들이켰다. 칼을 들고서 위협도 해보았다. 더 이상 술을 마신다면 이 자리에서 죽어버리겠다고 날뛰어 보기도 했다. 핏발선 그의 눈을 잠시 바라보던 아버지는 끙.하고 한숨을 쉬더니, 안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아무 소용이 없었다. 아버지는 구제불능이었다. 최소한 그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아버지는 정신병동중에서도 중환자들만 따로 격리시키는 독방에 입원했다. TV는 물론, 신문도 금지됐다. 외부세계와는 완전히 단절된 그곳에서 아버지는 매우 작아보였다. 아직도 술기운이 채 가시지 않은 그의 몸에서는 희미한 소독약 냄새가 났다. 그의 곁에 술병이 없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족들은 안도할 수밖에 없었다. 달마다 치르는 달거리처럼 꼬박꼬박 그렇게 병원비는 무자비하게 청구되었다. 동생의 사업실패로 마이너스 통장 대출을 받은 상태였지만, 어떻게든 마련해서 메꾸어 나갈 수밖에 없었다. 며칠동안 집에 들어가지도 못하고 야근을 한 탓에 눈에 띄게 몸이 축나는 것을 느끼면서도 나름대로 조용한 생활이 고맙게 느끼는 그였다.
가끔 병문안을 가면, 아버지는 희미한 웃음을 지었다. 언제나 붉은기가 감돌았던 아버지의 얼굴에는 그제서야 나이에 걸맞는 주름이 드러났다. 낯선 아버지의 모습에서 초조한 기색을 느낀 것은 입원한지 보름경이 지나서였다. 퇴원하고 싶다고 했다. 더 이상 술을 마시지 않겠다는 말은 하지 않은채 아버지는 그저 퇴원하겠다는 말만 반복했다. 다시 예전처럼 술을 마시더라도, 이전 술기운이라도 빼려면 최소한 한달은 걸린다는 담당의사의 말을 들으면서 그는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큰아버지로부터 전화가 걸려온 것은 그 즈음이었다. 그의 동생이 술을 가까이 한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정신병동에 그것도 혼자 중얼거리며 배회하는 정신병자들이 가득차 있는 격리병동에 입원되어 있다는 소식은 그의 이성을 잃게 만들었다. 남편을 정신병원에 집어 넣고서 잠이 오느냐, 밥은 꿀떡꿀떡 넘어가느냐, 차라리 독약을 넣어서 죽이지 그랬느냐는 등 듣는 사람 가슴에 천불을 일게 하는 말을 서슴없이 내뱉은 뒤, 판결을 내리듯 당장 퇴원시키라고 했다. 남의 속도 모르고 그런 소리를 하느냐는 대꾸도 하지 못한 엄마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우는 것 뿐이었다.
낯선 남자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동생을 찾았다. 며칠 전부터 집에 들어오지 않는다고 말해도 곧이 듣지 않았다. 장롱 속 깊은 곳에 숨겨놓고 숨바꼭질 놀이라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그는 갑자기 모든 것이 귀찮아졌다. 아무 말 없이 수화기를 내려 놓으려는 순간 비웃는듯한 그의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동생은 사채를 끌어다 썼다고 했다. 천만원에서 시작한 빚은 무한한 번식을 거듭해 천문학적인 숫자로 불어났다고 했다. 동생과 연락이 되지 않자, 그는 집으로 전화를 건 것이었다.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 그를 향해 뭔가 확답을 요구하는 사채업자의 의기양양하면서도 불안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며칠뒤 들어온 동생에게서는 그 어떤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랬다. 체념뿐이었다. 자신을 다그치는 그를 바라보는 동생의 눈은 텅 비어 있었다. 순간, 그는 모든 것이 끝났음을 깨달았다.
자정이 넘었는데도 어머니는 들어오시지 않았다. 이모와 함께 저녁을 드신다는 전화를 받기는 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늦어지고 있었다. 한참 후에서야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조심스레 방문을 열고 들여다보는 어머니의 얼굴은 등뒤의 빛에 가려 보이지 않았지만, 희미한 술냄새가 조심스레 밀려 들어왔다. /서럽다. 한숨 쉬듯, 토해낸 말에 그는 잠시 당황했다. /너무 서러워. 어머니가 서럽다고 할 때 아들은 어떻게 해야 하는걸까. 등을 두들겨 줄 수도 없는 노릇이고, 두 손을 끌어당겨 잡아 주는 것도 쑥스러울 것 같았다. 그래서 그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기로 했다. 서러운 어머니와 소심한 아들은 한참을 그러고 있었다.
동생은 에어컨을 설치하는 삼촌의 조수로 일을 나가기 시작했다. 온종일 드릴로 뚫어대고, 무거운 기계를 옮기고, 쉼없이 일해서 받는 돈은 100만원이었다. 아마 동생은 한푼도 쓰지 않고 고스란히 가져올 것이다. 전에도 그랬었다. 그리고 다른 이에게 너무도 당연한듯 돈을 빌려 썼다. 그는 아마도 변하지 않을 것이다. 쉽게 변하는 것은 그의 동생답지 않았다. 그는 집에 들어오면 방에 틀혀박혀 나오지 않았다. 거실에서 TV를 보며 웃는 동생과 엄마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일은 넘쳐나는데도 동생은 얼마전부터 월급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도 꼬박꼬박 일은 나갔다. 방문이 열리고 동생의 얼굴이 디밀어졌다. /형, 우리 술 한잔 할래? 내가 살게. /됐어. 피곤해. /에이..그러지 말고, 딱 한잔만 하자. /됐다니까. 나가. 동생은 잠시 머뭇거린뒤 조용히 문을 닫고 나갔다. 그러나, 이내 문이 열리고 동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 미안해.
그는 황급히 고개를 돌려 천정의 얼룩진 한 지점을 노려봤다. 어지러진 무늬가 뿌옇게 변하면서 무언가 차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두 눈을 감아버리면 모든 것이 편해질텐데도, 그는 그렇게 시린 채로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