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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 발견

외눈박이 원숭이섬

by iamlitmus 2007. 3. 26.
/너 선본 사람한테 네 키가 176이라고 말했어?
/말했지.
/그걸 말하면 어떻해. 주선해준 사람이 왜 미리 말하지 않았냐고 난리잖아.
/아니, 그게 속인다고 넘어갈 일이야? 뻔히 보고 물어보는데, 뭐라고 해.
/그렇다고 곧이 곧대로 말하면 어떻게 해. 무조건 170 조금 넘는다고 하라고 그랬지?
/키 큰것도 죄야? 이게 무슨 전염병이야?

처음 만났을때, 그는 자동차 운전석에 앉아 있었다. 마치 아이가 올라 앉은듯 달.랑.거렸다고 말하면 잔인한 표현인걸까?
가까운 카페로 들어가면서 흘낏 쳐다보니 그는 나보다 한참이나 아래에서 종종거리며 쫒아오고 있었다.
/키가 참 크시네요.
자. 지금부터 판에 박힌 질문리스트가 시작된다.
/네. (키가 참 작으시네요.)
/부모님이 크신가봐요?
/네. (부모님이 작으신가봐요?)
/운동하셨어요?
/아뇨.(잘하는 운동 있으세요?)
/키가 너무 크셔서 깜짝 놀랐어요.
/아..네.(키가 너무 작아서 깜짝 놀랐어요.)
/키 커서 좋으시겠어요.
/그렇죠. 뭐.(아담해서 좋으시겠어요.)
/하이힐까지 신으면 진짜 크겠네요.
/그렇죠.(키높이 구두 신으셔야 겠다.)

이 정도까지 이르게 되면, 내 기분은 이미 엉망진창이 되어 버리고, 잔인함만이 남게 된다. 그래도 기껏 신경써서 재밌게 해주고 들여보냈더니, 쪼르르 달려가 일러바치다니.
/오늘 만난 여자 어땠어?
/태어나서 그렇게 큰 여자는 첨 봤어. 세상에. 자그마치 176이래.
/뭐? 그래서?
/그래서는 뭐가 그래서야. 쪽팔려서 죽는 줄 알았어.
/이상하다. 분명 170 조금 안된다고 했는데.
/180 조금 안되는거겠지. 무섭더라니까.
/내 이 여편네를 당장..
뭐 이런식의 대화가 오갔을거라 생각한다.

사실, 주변사람들 중에 나보다 키가 큰 사람은 거의 없지만, 아..내가 너무 크구나..어떻하면 좋아, 부끄러워.식의 기분이 든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오히려 나 10센티만 잘라주라, 뭘 먹으면 키가 커져?식으로 온갖 부러움을 한몸에 받고 지내다가 우습지도 않은 맞선 상대에게 희귀동물을 보는 듯한 취급을 받게 되면 순식간에 악의 화신으로 변할 수밖에 없다.
외눈박이 원숭이가 사는 섬에 멀쩡한 원숭이가 들어 갔을때, 모두들 병신이라 놀려대며 따돌리니, 제손으로 한쪽 눈을 짖이겨 버렸다는 이야기가 떠오른다. 하지만, 어쩌나.. 멀쩡한 다리를 잘라낼 수도 없으니, 이대로 평생 내려다보며 살 수밖에. 대신, 당신들은 동춘서커스단에 가서 공굴리기를 하던가, 그것도 못하면 표라도 파시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