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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발견

진술[하일지]

by iamlitmus 2007. 3. 26.
화자는 단 한명, 국립대 철학교수인 주인공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의 진술로만 이루어져 있다.

10년전, 제자와 결혼한뒤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던 주인공은 결혼 10주년 기념으로 여행을 왔다가 경찰에 의해 끌려오게 된다. 처남의 살해혐의를 받고 있다는 말을 들은 그는 처음엔 어리둥절해 하지만, 조목조목 논리를 따져가며 얼토당토않은 오해를 풀고자 내키지 않는 진술을 하게된다. 그의 전처와의 관계, 외국유학 시절의 고달픔, 그가 얼마나 아내를 사랑하는지에 대해서까지..

독자들은 이 책을 읽어나가면서 어떻게 주인공이 이런 혐의를 받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궁금해질 것이다. 그러나 점점 진도가 나아갈수록 이 주인공의 진술이 어딘가 모른게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게 된다. 같은 이야기를 쉴새없이 반복하며 다른사람과는 다른, 현실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만의 세계안에 갖혀 살고 있는 주인공의 진술은 결국 정신병자의 읊조림에 불과하다는 것이 밝혀진다.

8년전에 죽은 아내와 여전히 함께하고 있다고 믿으며,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처남을 죽임으로서 자신의 혼란을 무마시키려 한 주인공의 정신상태는 분명 정상이 아니다. 그러나 그의 입장에서 본다면 단지, 잘못된 것을 바로 잡았을 뿐인것이다.

이 작품의 놀라운 점은 물 흐르듯이 이어나가는 화법이다. 글 전체가 대화체로 되어 있어 이야기의 끊김없이 지속적인 호흡이 유지되고 있다. 그러면서도 팽팽한 긴장과 막판의 반전은 예기치못한 흥분을 불러일으킨다.

얼마전 읽은 프랑스의 신예 작가의 '적의 화장법'이란 작품에서도 이러한 대화체식의 서술과 종국의 반전으로서 호평을 받은 바가 있지만, 이 작품에 비한다면 정말이지 초등학생이 크레파스로 선긋기같은 글이다.

'경마장 가는 길'로 부터 접하게 된 하일지의 글은 그의 수업을 통해서, 또한 이러한 작품을 통해서 그의 역량에 대해 찬탄을 금치 못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