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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자열전 /우리 아들은 한달에 100만원씩 꼬박꼬박 용돈을 줘. 날벌레가 어지러이 날아다니는 놀이터 벤치에 모인 아줌마들은 부지런히 손부채질만 할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얼마전엔 출장 갔다 오면서, 녹용을 사왔더라구. 아주 지 에미라면 끔찍하다니깐. 아유.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 나 먼저 들어가요. 한바탕 더운 바람을 흐트러뜨린뒤 분주한 걸음으로 사라지는 그녀를 지켜보던 101동 아줌마는 그제서야 참았던 말을 내뱉었다. /지 아들 등골 빼먹는줄도 모르고 자랑질은. /그러게 말예요. 자기 얼굴에 침뱉기지. 요즘 살기가 얼마나 힘든데. 다음날,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동일한 인물들이 모인 가운데 둘도 없는 효자를 둔 아줌마는 한창 핏대를 올려대고 있었다. /아니, 내가 없는 말 했어? 내 새끼 잘 키.. 2007. 3. 26.
너나 잘해 언니는 성격을 바꿔야돼. 운동을 해보는 건 어때. 격투기나 검도같은거. 일단 한번 해보면 달라진다구. 왜 해보지도 않고 그런 소리부터 해. 언니는 스스로를 믿는 맘조차도 없어. 언젠가라는 말 좀 쓰지마. 언니만 힘든 거 아니잖아. 그런 말 하는 건 안 힘들어? 다른 사람도 다 똑같아. 뭐라구? 회사 그만 둘거라구? 참나.. 그런 말하면 회사에서 언니 붙잡을 것 같지? 언니 없으면 당장 올스톱 될 거 같지? 언니. 내가 회사 그만두고 아르바이트 구하려고 돌아다니는데, 나이가 딱 걸리더라. 레스토랑이나 호프집같은데 얼마나 힘든지 모르지. 장난아냐. 내가 4월 중순에 사표를 냈는데, 팀장이 5월달 되서야 수리해준거 알아? 다들 내가 팀장이랑 스캔들 있었다고 생각하는데 미치겠다니까. 부장님이 전화와서는 그만 두.. 2007. 3. 26.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시켜줘 엄마의 성화에 못이겨 대표적 결혼정보회사인 듀오의 상담을 받은 적이 있다. 위풍당당한 관세청 건물의 로얄층에 위치한 그곳에서 결혼 상담을 받는 기분은 묘했다. 40대 초반정도의 단아한 기품을 가진 웨딩플레너는 침착하게 내 프로필을 적어 나갔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떤 타입의 남성을 원하세요? 이렇게 직선적으로 물어봐 주시면, 나 또한 솔직하게 대답하는 것이 인지상정이었다. /현명한 사람이요. 그녀는 잠시 내 얼굴을 바라보고는, 들리지 않는 한숨을 내쉬었다. /현명하다는 의미에는 많은 것이 포함되거든요.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는 아이를 타이르듯, 조용한 목소리였다. 당황한 김에 생각나는대로, 주저리주저리 읊어댈수록, 그녀의 얼굴은 점차 굳어져갔다. /제가 보기엔, 배우자가 아니라 친구를 원하시는 것 같은.. 2007. 3. 26.
그녀의 결혼식 늦깎이 신부인 M은 결연한 기운을 내뿜으며, 그렇게 신부대기실에 앉아 있었다. 긴장과 피로로 잔뜩 굳어진 그녀에게 너무 예쁘다라고 말할 겨를도 없이 결혼식은 진행되었다. 미리 식장에 자리잡고 있던 S의 얼굴이 보였다. 앉자마자 곧바로 양가 어머니의 촛불 점화가 시작되었고, 여느 결혼식과 다름없는 순서가 기다리고 있었다. S가 소근거리며 내 옆자리에 앉은 J를 소개시켜주는데, 낯선 얼굴이다. 그녀는 나를 기억한다는데, 나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미안해. 여자는 기억을 잘 못하거든. 깐깐한 성격을 말해주듯 바짝 마른 몸집의 J는 별로 개의치 않는 표정이다. 오히려 S가 당황하며, 우리가 전에 어디서 만났고, 어떤 일을 했었는지 주석을 달아 주는데도 끈질기게 생각이 나지 않았다. 순간, 기억 저편 아스라히.. 2007. 3. 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