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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 발견

좋은 사람 있으면 소개시켜줘

by iamlitmus 2007. 3. 26.

엄마의 성화에 못이겨 대표적 결혼정보회사인 듀오의 상담을 받은 적이 있다. 위풍당당한 관세청 건물의 로얄층에 위치한 그곳에서 결혼 상담을 받는 기분은 묘했다. 40대 초반정도의 단아한 기품을 가진 웨딩플레너는 침착하게 내 프로필을 적어 나갔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어떤 타입의 남성을 원하세요?
이렇게 직선적으로 물어봐 주시면, 나 또한 솔직하게 대답하는 것이 인지상정이었다.
/현명한 사람이요.
그녀는 잠시 내 얼굴을 바라보고는, 들리지 않는 한숨을 내쉬었다.
/현명하다는 의미에는 많은 것이 포함되거든요.
말귀를 알아듣지 못하는 아이를 타이르듯, 조용한 목소리였다.
당황한 김에 생각나는대로, 주저리주저리 읊어댈수록, 그녀의 얼굴은 점차 굳어져갔다.
/제가 보기엔, 배우자가 아니라 친구를 원하시는 것 같은데…아닌가요?
그랬었나. 나의 이상형은 그런 타입이었나.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했다.
/그런데, 원래 그렇게 인상을 쓰세요?
오기 싫은 곳에 왔으니, 좋아죽겠는 표정은 아니었겠지만, 결혼 한번 해보겠다고 온 사람한테 할 소리는 아니었다.

며칠뒤, 다른 결혼정보회사의 전화를 받았다.
/딱 한달간만, 가입비 50%를 할인해드려요. 8분을 만나게 해드리구요, 만약, 성사되지 않으면 1-2회 추가로 더 소개시켜드릴께요.
/저기요. 아직까지는 돈들여서 결혼할 마음은 안생기거든요.
/지금 나이가 어떻게 되세요?
/3*살이요.
/어머. 지금 그렇게 느긋하실때가 아닌 것 같은데요. 제가 정말 잘 해드릴께요.

엄마가 내민 쪽지에는 종각 결혼상담소라는 글씨와 함께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건성으로 받아들고 계속 모니터만 주시하는 내게 엄마는 아예 자리를 잡고 앉아 말을 붙였다.
/너 여기 가봐. 경험도 많고, 남자 회원들도 아주 많대.
/응.
/내일 당장 가봐. 어떻게든 이번 해 안에는 결혼해야해.
/응.
/남들은 연애질도 잘하는데..에그…병신. 내가 너 때문에 혈압이 안 떨어져.
/알았어.
/예쁘게 화장하고 사진도 다시 찍어. 옷도 좋은 걸로 새로 사입고.
/응.
어차피 계속 시달릴바에는 빨리 끝내버리자는 생각이 들어, 적혀있는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마요네즈와 식용유를 섞은 듯한 목소리의 여자가 지나치게 반가운 목소리로, 당장 내일이라도 상담을 받으러 오라며 안달했다. 국내 관훈 제1호의 전통을 가진, 이 분야에서는 따라올 자가 없다는 자링질도 빼놓지 않았다.
다음날, M군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만 빼놓고 모든 친구들이 결혼한 탓에 심란하기 그지없어하는 그에게 같이 가자고 하자, 두말없이 따라오겠다고 했다.

평소와는 달리 말쑥한 차림으로 나타난 M군을 놀려대며, 결혼상담소로 향했다. 골목 깊숙한 곳에 위치한 건물은 맥주와 오물로 찌든 냄새가 진동하고, 이른 저녁부터 취한 남자들의 고함소리가 건물 전체를 울리고 있었다. 돌리는 손잡이 주제도 못되는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전형적인 보험 설계사처럼 보이는 여자가 일어섰다.
/참 인상이 좋네.
처음 듣는 소리였다. 그나마 무난한 표현이 인상이 참 강하네요.수준이었기에, 그녀의 빈말에는 신경쓰지 않기로 했다.
/친구분도 참 선하게 생겼다.
영업력이 강한 여자였다. 그녀가 내민 명함에는 김희선이라고 씌어 있었다. 약간 우스웠다.
복사한지 오래 된 듯한 가입신청서를 내밀며, 신상명세를 적으라고 했다. 학교, 재산, 부모형제의 직업 등 일반적으로 대놓고 묻기 어려운 내용들로만 이루어져 있었다. 덩달아 M군도 열심히 적기 시작했다.
/자..그럼 어떤 타입을 원해요?
아..또 나왔다. 난 대답대신 인상을 쓰지 않도록 조심하며 바보처럼 웃어주었다. 최소한 착해보이기는 했을 것이다.
/그냥 일반적인 기준이죠. 뭐.
/그렇죠? 그럼..어디보자. 나이가 있으니까, 위로 몇살, 아래로 몇살? 그리고, 혹시..아..아니다.
난 그녀가 무엇을 말하려고 했는지 금새 알아차렸다. 엄마한테 수도없이 들어왔던 말이다. 척하면 착이다.
/재취요? 싫은데요.
/그렇죠? 그런데..정말 조건이 너무 좋은데, 딱 그거 하나라면…아냐. 아냐... 신경쓰지 말아요.
누군가에게 주의받곤 했던 반존대말이 남발되고 있었다. 내가 말할때는 몰랐는데, 맘에 안드는 사람이 그렇듯 자유롭게 구사하는 것을 들으니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그녀는 두꺼운 파일 몇권을 가지고와 하나씩 넘겨가며 신속한 프리젠테이션을 하기 시작했다.
/이 사람은 의사야. 형제들도 참 잘됐어. 동생은 결혼했는데, 부부가 다 약사야. 부모가 차려줬다고 하더라구. 아..맞다. 안되겠네. 의사 와이프 원한다고 했는데..
/이 사람은 지금 삼성 연구원인데, 사람이 참 좋아. 착하고. 근데..키가 좀 작아. 좀 작은거 괜찮죠?
/어디보자. 옳지. 이 사람이 딱이겠다. 이 집은 부모가 돈이 좀 있어. 자기 집도 따로 있고. 서글서글하고 참 좋더라구. 근데, 지금 머릿속에 입력하고 있어요?
입력은 커녕 나 같은 병신들이 참으로 많구나.라는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별다른 반응이 없자, 그녀도 흥이 깨진듯 했다.
/맞다. 딱 어울리는 사람이 생각났어요. 이쯤에 있었는데..아. 여기있다. 이 사람, 장국영 닮지 않았어요? 교포인데, 부모는 호주에 있고, 거기서 사업해요. 이 사람은 결혼 때문에 잠깐 들어와 있는 상태이고. 아주 잘생겼어. 어때요?
눈치빠른 김희선은 빛에 버금가는 속도로 내 반응을 살핀 뒤, 더 이상 의욕이 생기지 않는듯 파일을 덮어 버렸다. 그러나, 그녀는 또 다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친구분은 집이 강남이네요? 재산이 아유..굉장히 부자시구나.
친구들 중 가장 알부자로 소문난 M군(물론, 그의 부모님꺼지만)은 너무나도 정직하게 부동산 가치를 적었던 모양이다. 이제 김희선은 나의 존재를 무시하고, M군에게 전력투구하기로 결심한 듯 보였다. 이내 여성들로만 채워져 있는 파일이 대령되었다.
/이 집은 교육자 집안이야. 여자는 유치원선생님이고. 아버님은 초등학교 교감이야. 어머니도 대학까지 나온 엘리트고. 사진 좀 봐요. 너무 참하죠? 천상 여자예요.
M군의 아킬레스건은 유치원 선생님이었다. 여태껏 그가 만나왔던 여성들은 모두 유치원교사였다. 이상하게 나이가 많건, 적건 유치원 교사라고 하면 무조건 좋아했다. M군의 표정이 흔들리는 것을 놓치지 않고, 김희선은 박차를 가했다.
/이 여성은 예술해요. 첼로. 외국에서 유학하고 와서 지금은 연주활동 하고 있어요. 이상형이 자기 음악을 이해해 줄 수 있는 남자래.
/음..아. 그리고 이 여성은 나이가 좀 어려요. 9살 차이면..좀 많나?
절대 그럴리가 없었다. 여느 남자들처럼 M군도 어린 여자를 좋아했다. 어느새 M군은 파일에 달려들 듯 엎드려 있었다.
/친구분 같은 경우는 금방 결혼 할 수 있어요. 조건이 좋거든. 결혼하면 집 따로 사주시는거 맞죠?
M군은 힘차게 네.라고 대답했고, 김희선의 얼굴에는 만족스런 빛이 흘러 내렸다.
/가입비 40만원에 성사되면 200만원이예요. B타입은 80만원 내고 성사비 30만원.
입을 쩍 벌린 나를 보며, 김희선은 비웃음을 흘리며 덧붙였다.
/이거 비싼거 아니예요. 솔직히, 결혼하면서 100만원도 안 들일 생각은 아니겠죠?

건물밖으로 나오니, 봄비가 추레하게 내리고 있었다. 나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제일 먼저 눈에 띄는 술집으로 들어갔다.
/독사 같은 년.
급하게 마신 소주가 목에 걸려 말 끝이 갈라져 나왔다.
/괜찮은 것 같던데. 엄마한테 말씀드려서 등록해라.
M군은 자신의 가치를 높게 봐준 김희선이 그리 싫지 않은 모양이다.
그날 밤, 나는 수십마리의 독사를 불러내어 참이슬에 푹 담가버렸다.

그다지 반응이 시원치 않자, 엄마가 내민 두번째 카드는 논현동 결혼상담소였다. 등쌀에 못이겨 찍은 사진은 잔뜩 화가난 모습이었고, 파출소 벽에 붙여 놓으면 당장 현상수배감이었다. 시간마다 닥달하고, 눈마주치기가 겁날 정도에 이르자, 난 다시 항복하고 말았다. 괴로움에 몸부림치는 내게, 같은 이유로 심한 우울증을 앓고 있던 K는 그래도 너희 집은 돈들여서라도 시집 보내주는구나.라며 부러워했다.
신성결혼이라는 그럴듯한 간판을 내건 사무실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결혼을 성사시켜 주는 곳이 마치 탐정사무실처럼 느껴졌다. 어떤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끊임없이 전화벨이 울려대고 실장이라는 여자는 바빠 죽는 척을 했다.
/어떤 타입을 원하세요?
이젠 나도 자연스럽게 대답할 자신이 생겼다.
/보통 사람이요.
/인상이 참 좋네요
같은 소리를 연거푸 들으니, 사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젊은 분이 사고가 트이셨네요. 보통, 내가 뭐가 모자라서 이런 곳에 와야 하냐고 그러는데.
내 말이 그말이다.
/이제 나이도 있으시니, 주위에 만나볼 사람은 다 만났을테고..솔직히, 결혼은 정보력이죠. 그리고, 제가 늦게 결혼해봐서 아는데요. 나이들어서 결혼하면 아이가 가장 큰 문제가 되죠.
진심으로 안타까운 눈빛을 보내준 그녀에게 사실은, 미치겠다고, 돌아버리겠다고 하소연하고 싶은 맘이 들뻔했지만, 집에 가서 상의해보겠다고 간신히 말하고서는 급히 나와버렸다.

/전에 TV에 나왔던 수유리의 그 미용실 말야. 나 어제 거기 갔다왔다.
미용실을 운영하며, 단골들에게 중매를 몇 번 서준 것이 소문이 나서, 아예 본업이 되어버렸다는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었다. 엄마의 정보력은 CIA에 못지 않았다.
/10만원을 내면 4번 소개시켜준대. 그래도 안되면, 5만원 더 내고 다시 4번 해준대.
밤새 일하느라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나를 붙잡고, 엄마는 새로운 희망을 불어 넣고 있었다.
/이제 그만 좀 해. 내가 알아서 할게.
귀찮은듯 돌아눕는 내 어깨를 붙잡고서 마구 흔들어대는 엄마의 손아귀힘은 놀라웠다. 아픔과 짜증이 뒤섞이자, 히스테릭의 정상고지가 눈앞을 지나갔다.
있는 힘껏 손을 떨쳐낸뒤, 소리를 질렀다. 내가 아닌 다른 이가 광분하며 날뛰어댔다. 엄마는 흠칫 놀라 물러 앉았다.
/컴퓨터는 왜 켜놨어. 돈 들잖아. 빨리 꺼.
/볼꺼야. 놔둬.
전기세가 얼만데.라고 중얼거리는 소리와 함께 딸그락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돌려 보니, 엄마가 마우스를 들여다보며 컴퓨터 전원을 끄려고 애쓰고 있었다. 순간, 미안한 맘이 한탄강처럼 쏟아져 들어왔다. 항상 이런식이다. 저질러놓고 후회한다.

전화번호부를 꺼내 아는 이들에게 모조리 파발을 띄웠다.
/남자 소개시켜줘.
그들의 반응은 제각각이다.
/진짜야? 언니, 결혼 할 생각 없었잖아.
/언니 눈이 좀 높아야지.
/언니는 혼자 사는게 훨씬 더 멋있는데.
/이러다가 한달만에 가는거 아냐?

몇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새로운 소스들이 속속 도착하기 시작했다. 이젠 나도 엄마한테 위풍당당해질 수 있게 되었다.
/엄마는 내가 결혼하고 나면 얼마나 후회하려고 이래?
/가까운데 살거니까 괜찮아. 손 뻗으면 닿을 만한 곳에 집 얻으면 돼.
/누가 근처에서 산대? 아주 멀리 가버릴거야. 지방같은데로.
/그러면, 너랑 가까운데로 이사갈거야. 그래서 너 반찬도 해주고, 김치도 담궈줄거야. 가긴 어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