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깎이 신부인 M은 결연한 기운을 내뿜으며, 그렇게 신부대기실에 앉아 있었다. 긴장과 피로로 잔뜩 굳어진 그녀에게 너무 예쁘다라고 말할 겨를도 없이 결혼식은 진행되었다.
미리 식장에 자리잡고 있던 S의 얼굴이 보였다. 앉자마자 곧바로 양가 어머니의 촛불 점화가 시작되었고, 여느 결혼식과 다름없는 순서가 기다리고 있었다. S가 소근거리며 내 옆자리에 앉은 J를 소개시켜주는데, 낯선 얼굴이다. 그녀는 나를 기억한다는데, 나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미안해. 여자는 기억을 잘 못하거든.
깐깐한 성격을 말해주듯 바짝 마른 몸집의 J는 별로 개의치 않는 표정이다. 오히려 S가 당황하며, 우리가 전에 어디서 만났고, 어떤 일을 했었는지 주석을 달아 주는데도 끈질기게 생각이 나지 않았다.
순간, 기억 저편 아스라히 다가오는 것이 있어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아..그때..
더 이상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표정을 지어주는 J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당사자들에게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지루한 주례사는 아직도 발단-전개에서 움직일줄 모르고 있었다. 조심스레 주위를 둘러보니, 나처럼 두리번거리는 수많은 눈빛들이 목적없이 배회하고 있었다.
식장 뒷편에 부페 테이블이 준비되어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자리에서 일어나 음식을 담을 용기를 가지지는 못한 듯 했다. 이윽고, 신랑신부가 양가부모에게 인사하는 순서가 되었다. 신부의 불문율 중 하나는 절을 할 때 절대로 친정엄마와 눈을 마주쳐서는 안된다.이다. 백이면 백, 그 순간 눈물을 쏟게 된다고 했다. 아니나다를까 M은 그때부터 펑펑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주례는 마치 이것을 기다렸다는 듯,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신파조로 중계를 해나갔다. 살짝 짜증이 나려고 했지만, 남의 결혼식에 감나라 배놔라 할 입장은 아니었다.
중학교때 참가했던 수련회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빨강 모자를 쓴 조교들은 앞으로 굴러, 뒤로 굴러, 일어나, 앉아를 쉴새없이 반복해대며 그 당시까지는 순진했던 아이들을 극한 상황으로 밀어 넣은 뒤, 뜬금없이 부모님의 존재를 떠올리게 하여 눈물을 쏟게 만드는 전략을 일삼았다. 산등성 너머를 향해, 있는 힘껏 엄마.라고 외칠때의 그 비장함을 가슴에 품고 부모님께 편지를 쓰게 하는 것이 그 다음 코스였다. 집에 돌아와 일주일뒤 도착한 그 편지를 읽을 때의 무안함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S도, J도 같은 추억을 갖고 있었기에 잠시동안 서로 마주보며 웃었다.
어느새 신랑, 신부의 행진이 끝나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는 사진사 앞의 M은 언제 그랬냐는듯 해맑게 웃고 있었다.
어정쩡한 폼으로 S가 부케를 받고, 케잌을 자르고, 새로 갈아 입은 드레스를 나풀거리며 하객들에게 인사를 하고, 다시 폐백을 위해 사라졌을때쯤에 이르자, 너무나 피곤해서 도저히 버틸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만 나는 그만 일어서자는 눈빛을 S에게 보냈다.
사건은 작별인사라도 하고 가자는 S의 제안에 따라 폐백실로 향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언니가 세명이나 있는데다가 헬퍼 아줌마가 있었기에 친구의 도움은 필요없을거라고 생각한 우리와는 달리 M의 언니는 S에게 부케까지 받은 친구가 가긴 어딜 가냐고 잔뜩 눈을 흘겼던 모양이다. 쪽도리를 쓰고 있던 M도 서운한 기색을 감추지 않으며 붙잡는 터에 너무도 쉽게 생각했던 우리는 의리도 뭣도 없는 나쁜 년들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미 맘이 상할대로 상해버린 S와 J는 굳은 얼굴로 호텔을 나섰다.
토요일의 명동거리는 부자연스런 활기와 젊음이 넘쳐났지만, 우리는 잠시동안 아무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앞만 보고 걸음을 옮겼다.
/웃긴다. 정말.
오랜만에 루즈를 바른 S의 입술에서 낮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결혼식에 와준 것만해도 고마워해야 하는거 아냐? 뭘 그렇게 바라는게 많아.
/한달전에 나한테 전화해서 뭐라는 줄 알아? 이제부터 주말은 자기를 위해서 몽땅 비워 놓으라고 하더라구. 무슨 왕세자비 시집가니?
/야..야..너희들은 내 결혼식때 그냥 우아하게 와서 밥만 먹고 가라. 나 그래도 엄청 고마워할 테니까.
난 잠시 어리둥절해졌다. 이렇듯 쌓인 것이 많았는데, 어떻게 그동안 참아낼 수 있었던 걸까. 내 결혼식때 부르려면 앞으로 이들에게 참으로 잘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함 들어올때도 말야. 아참. 너 함들어올 때 왜 안왔어?
전혀 모르는 이야기였다.
/응? 나 연락 못 받았는데.
/그래? 너 안오길 잘했다. 얼마나 대단했다구. 근데..너 안불러서 서운한거 아니지?
/아니. 뭐. 나랑 별로 친하지도 않았잖아. 기대도 안하니까 실망도 안해.
그랬다. M은 S를 통해 알게 된 친구였고, 1년에 한번 볼까 말까한 친구였기에 소울메이트라는 단어를 갖다 붙이기에는 무리였다.
/함 들어온 날, 완전히 드러누웠잖아. 다 토하고. 그애는 방에 들어가 누워있는데 우리는 멀뚱멀뚱 앉아 있었다니까. 그게 뭐니. 사람 불러다놓고.
/원래 몸이 약했는데, 긴장은 계속 쌓였지. 먹은 것은 없지. 결국 쓰러지더라구.
M은 한 겨울에도 더운 나라에 가서 썬탠을 하고 온 것 같은 건강한 피부색을 갖고 있었지만, 몹시도 몸이 약했다. 운동한답시고 수영장에 다니다가 앰블런스에 실려가는 일은 놀랍지도 않은 일이었고, 온갖 보약에 링겔을 몸에 칭칭 감고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앞으로 네 남편은 병원비 대려면 돈 많이 벌어야 겠다고 농담 삼아 말할 정도였다. 만날때마다 앓는 소리를 듣는 것은 거북했지만, 그렇다고 내가 특별히 그녀를 위해 무언가를 해준 적도 없었기에 뒤돌아서면 잊어버리고는 했다.
그러나, 그 순간만은 M의 몸이 약한 것은 죄악이었다. 그녀는 아파서는 안되는 거였다. 아무리 힘들어도 이를 악물고 씩씩하게 털고 일어나 주변 사람들을 챙겼어야 했다. 그렇지 못했기에 그녀는 이렇듯 원망을 듣는 것이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것은 다른 날도 아닌, M의 결혼식에 우리가 너무 심한 것이아니었나.라는 뒤늦은 자책감이 들었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내가 M이 불어 배우는거 도와줬었잖아. 근데, 빠르더라구. 언어적인 재능이 있는 것 같아.
/프랑스 가면 고생할텐데, 큰일이다. 그렇게 몸이 약해서.
나도 뭐라고 말을 거들고 싶었지만, 솔직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왜 나는 이런 때 빈말도 하지 못하는 멍충이일까.
결혼식을 앞두고 M과 S를 만났었다. 일이 있어서 나중에 도착한 나는 커다란 보따리를 들쳐 메고 온 시내를 돌아 쳤던 터라 피곤이 머리 꼭대기까지 차오른 상태였지만, 결혼을 축하한다고 M에게 진심으로 말했다. 진짜다.
/결혼해서 프랑스로 들어 간다며? 이야..나중에 나 가도 돼?
/그래. 꼭 와. 내가 맛있는 음식까지 해주지.
M은 프랑스에서 건축회사에 다니는 남편과는 별도로 미술 공부를 할 예정이라고 했다. 랭귀지 스쿨을 다니기 위해 입학 절차를 밟는 중이라며, 먼저 프랑스에 갔다 온 경험이 있는 S에게 이것저것 묻고 싶은 것이 많은듯 보였다. 이내 분위기는 나와는 다른 세계에 관한 것들로 이어졌고, 난 그저 허브차를 마시며 묵묵히 듣는 것 이외에는 다른 할 일이 없어졌다.
/결혼 선물로 뭐 받고 싶어?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
잠시 대화가 끝난 틈을 타서 끼어 들었다.
/오빠가 이미 그곳에 방을 얻어 살고 있기는 한데, 곧 옮길거거든. 필요한건 그때 가서 사려구.
/난 전기주전자가 참 좋던데. 그거 안 필요해?
/야. 프랑스가면 훨씬 좋은거 많아. 싸기도 하구.
살짝 무안해졌다.
/그럼 부부찻잔 같은거..사줄까?
이때 S가 갑자기 생각난듯 말을 거들었다. 자신이 갔었던 어떤 상점에 가면 싸고 고급스러운 그릇이 많다고 했다. M은 눈을 반짝이며 그녀에게 돌아 앉았다. 다시 내가 모르는 먼나라 이야기가 이어졌다.
/아참. 너 결혼식때 운전해줄 수 있어?
/왜?
/결혼식 당일날 야외촬영 하려고 하는데, 차가 1대여서 다 움직이기 힘들 것 같거든.
/싫어.
부탁한 M보다도 옆에 있던 S가 더 당황하며 어머. 너 굉장히 단호하게 거절하는구나.라고 했다.
/나 아침에 못 일어나. 알잖아.
/그럼, 너 디카 있으니까, 스냅 사진 찍어줘.
/싫어.
그들의 얼굴은 뭔가 합당한 이유를 묻고 있었다.
/사진은 S가 더 잘 찍잖아. 또, 너도 디카 있고.
나와 집이 같은 방향인 M과 전철을 타고 오면서도 어색한 침묵은 여전했다. 헤어지기전 M은 신랑이 프랑스에서 들어오는 대로 다함께 식사라도 하자는 말을 잊지 않았고 나도 그러마했다.
/오늘 야외촬영도 못했다고 하더라구. 그럼 어차피 내가 안가도 상관없는 일 아냐? 그런데 왜 안왔다면서 서운한 티를 내냐구.
돌림노래처럼 다시 M을 성토하는 분위기가 도래했다. 나는 슬슬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그나마 화제를 바꾼 것이 혼수 이야기였다.
/호텔에서 하는 결혼식치고는 좀 그렇지 않았니? 나같으면 그 돈 주고 이런데서 안한다.
/시어머니한테 밍크코트 롱으로 해줬댄다. 이제 여름 다가오는데 웬 밍크코트니? 아까 보니까 키도 작으시던데, 어울리지도 않게.
/예단도 많이 했다면서? 그래도 함들어온거 보니까 다이아몬드 셋트로 받았더라. 꽤 크던데? 한 1캐럿 될라나?
그렇구나. 결혼을 하려면 돈이 많이 드는거구나. 우린 어떻하니. 10년넘게 직장생활을 한 M은 알뜰한 편이니 모아놓은 돈이라도 있을텐데 말야. 두서없이 오가는 대화의 끝이 넋두리로 넘어가버리고, 아. 역시 스트레스는 수다로 풀어야 제맛이야.라는 마무리로 끝을 맺었다.
며칠뒤, S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잘 지내지?
/얼마전에 봐놓구서는 새삼스럽게 뭘.
/하긴. 근데 너 M 전화 받았니? 월요일에 만나자는거?
/아니.
M은 정말 나를 좋아하지 않는건가.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여전히 그녀에게 서운한 맘은 들지 않았다.
/프랑스 가기 전에 다 함께 보자고 그러더라구. 나올거지?
/에..싫다구. 결혼식 간 것도 왜 갔나 싶다. 지금 생각으로는.
/M말야. 나한테 전화하자 마자, 그날 서운했다고 또 그러는거 아니? 정말 웃기지 않니?
그럼 너도 안보면 되잖아.라고 대꾸하고 싶었지만 그저 가만히 듣기로 했다.
/네가 편한가보다. 나한테는 그런 말 안하는데. 하긴. 나보다는 너랑 더 친하잖아.
/아니, 그애는 왜 나한테만 그런다니?
/네가 잘 받아주니까 그렇지. 나한테 그래 봐라. 내 입에서 고운 소리 나오니?
/어쨌든, 그날 나와라. 나만 가는거 싫단 말야.
/J도 나올거 아냐. 그럼 됐네. 난 안간다.
약속이 있다던 월요일, M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오늘 시간 있어? 인사동쯤에서 모두 함께 저녁 같이 먹자.
/어..미안. 나 집에 일 있어서 못 나가는데. 오늘 못보면 평생 못보는 것도 아니잖아. 내가 곧 프랑스 뜬다. 그때 보자.
/그래? 그럼 할 수없지 뭐.
약속시간 30분전. S로부터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너 안 나가? 1시간 넘게 걸리잖아.
/30분 늦춰졌어. 웃겨. 정말. 진짜 나가기 싫어. 너 진짜 안 나올거야?
/안나갑니다. 더 이상 말씀하지 마십시오.
며칠뒤, M으로부터 이메일이 도착했다. 프랑스에 무사히 도착했다는, 여러분이 보내주신 관심과 사랑을 절대 잊지 않겠다는 감동적인 내용이었지만 단체메일임이 뻔히 드러나는 수십명의 주소탓에 제몫을 해내지 못하고 있었다. 마침 난 거나하게 술을 마신 상태였던터라 없는 감정을 끌어모아 정성어린 답장을 보냈다.
/나 프랑스가면 재워 줘야 한다.
M은 프랑스에서 살던, 어디에서건 징그럽게 오래 살거라는 믿음이 생긴다. 아마도 결혼식때 들었던 이야기만으로도 적어도 30년은 수명이 늘었을 테니. 그 날 이후, J, S와는 연락이 끊겼다. 아마도 누군가의 결혼식때나 다시 보게 되겠지. 그나저나 내 결혼식때는 그들 발목에 끈을 묶어 내 허리에 감아놔야 하나.
미리 식장에 자리잡고 있던 S의 얼굴이 보였다. 앉자마자 곧바로 양가 어머니의 촛불 점화가 시작되었고, 여느 결혼식과 다름없는 순서가 기다리고 있었다. S가 소근거리며 내 옆자리에 앉은 J를 소개시켜주는데, 낯선 얼굴이다. 그녀는 나를 기억한다는데, 나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미안해. 여자는 기억을 잘 못하거든.
깐깐한 성격을 말해주듯 바짝 마른 몸집의 J는 별로 개의치 않는 표정이다. 오히려 S가 당황하며, 우리가 전에 어디서 만났고, 어떤 일을 했었는지 주석을 달아 주는데도 끈질기게 생각이 나지 않았다.
순간, 기억 저편 아스라히 다가오는 것이 있어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아..그때..
더 이상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표정을 지어주는 J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당사자들에게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지루한 주례사는 아직도 발단-전개에서 움직일줄 모르고 있었다. 조심스레 주위를 둘러보니, 나처럼 두리번거리는 수많은 눈빛들이 목적없이 배회하고 있었다.
식장 뒷편에 부페 테이블이 준비되어 있었지만, 어느 누구도 자리에서 일어나 음식을 담을 용기를 가지지는 못한 듯 했다. 이윽고, 신랑신부가 양가부모에게 인사하는 순서가 되었다. 신부의 불문율 중 하나는 절을 할 때 절대로 친정엄마와 눈을 마주쳐서는 안된다.이다. 백이면 백, 그 순간 눈물을 쏟게 된다고 했다. 아니나다를까 M은 그때부터 펑펑 눈물을 쏟기 시작했다.
주례는 마치 이것을 기다렸다는 듯, 의기양양한 목소리로 신파조로 중계를 해나갔다. 살짝 짜증이 나려고 했지만, 남의 결혼식에 감나라 배놔라 할 입장은 아니었다.
중학교때 참가했던 수련회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빨강 모자를 쓴 조교들은 앞으로 굴러, 뒤로 굴러, 일어나, 앉아를 쉴새없이 반복해대며 그 당시까지는 순진했던 아이들을 극한 상황으로 밀어 넣은 뒤, 뜬금없이 부모님의 존재를 떠올리게 하여 눈물을 쏟게 만드는 전략을 일삼았다. 산등성 너머를 향해, 있는 힘껏 엄마.라고 외칠때의 그 비장함을 가슴에 품고 부모님께 편지를 쓰게 하는 것이 그 다음 코스였다. 집에 돌아와 일주일뒤 도착한 그 편지를 읽을 때의 무안함이란 이루 말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S도, J도 같은 추억을 갖고 있었기에 잠시동안 서로 마주보며 웃었다.
어느새 신랑, 신부의 행진이 끝나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대는 사진사 앞의 M은 언제 그랬냐는듯 해맑게 웃고 있었다.
어정쩡한 폼으로 S가 부케를 받고, 케잌을 자르고, 새로 갈아 입은 드레스를 나풀거리며 하객들에게 인사를 하고, 다시 폐백을 위해 사라졌을때쯤에 이르자, 너무나 피곤해서 도저히 버틸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만 나는 그만 일어서자는 눈빛을 S에게 보냈다.
사건은 작별인사라도 하고 가자는 S의 제안에 따라 폐백실로 향하면서부터 시작되었다. 언니가 세명이나 있는데다가 헬퍼 아줌마가 있었기에 친구의 도움은 필요없을거라고 생각한 우리와는 달리 M의 언니는 S에게 부케까지 받은 친구가 가긴 어딜 가냐고 잔뜩 눈을 흘겼던 모양이다. 쪽도리를 쓰고 있던 M도 서운한 기색을 감추지 않으며 붙잡는 터에 너무도 쉽게 생각했던 우리는 의리도 뭣도 없는 나쁜 년들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미 맘이 상할대로 상해버린 S와 J는 굳은 얼굴로 호텔을 나섰다.
토요일의 명동거리는 부자연스런 활기와 젊음이 넘쳐났지만, 우리는 잠시동안 아무말도 하지 않고 묵묵히 앞만 보고 걸음을 옮겼다.
/웃긴다. 정말.
오랜만에 루즈를 바른 S의 입술에서 낮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결혼식에 와준 것만해도 고마워해야 하는거 아냐? 뭘 그렇게 바라는게 많아.
/한달전에 나한테 전화해서 뭐라는 줄 알아? 이제부터 주말은 자기를 위해서 몽땅 비워 놓으라고 하더라구. 무슨 왕세자비 시집가니?
/야..야..너희들은 내 결혼식때 그냥 우아하게 와서 밥만 먹고 가라. 나 그래도 엄청 고마워할 테니까.
난 잠시 어리둥절해졌다. 이렇듯 쌓인 것이 많았는데, 어떻게 그동안 참아낼 수 있었던 걸까. 내 결혼식때 부르려면 앞으로 이들에게 참으로 잘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함 들어올때도 말야. 아참. 너 함들어올 때 왜 안왔어?
전혀 모르는 이야기였다.
/응? 나 연락 못 받았는데.
/그래? 너 안오길 잘했다. 얼마나 대단했다구. 근데..너 안불러서 서운한거 아니지?
/아니. 뭐. 나랑 별로 친하지도 않았잖아. 기대도 안하니까 실망도 안해.
그랬다. M은 S를 통해 알게 된 친구였고, 1년에 한번 볼까 말까한 친구였기에 소울메이트라는 단어를 갖다 붙이기에는 무리였다.
/함 들어온 날, 완전히 드러누웠잖아. 다 토하고. 그애는 방에 들어가 누워있는데 우리는 멀뚱멀뚱 앉아 있었다니까. 그게 뭐니. 사람 불러다놓고.
/원래 몸이 약했는데, 긴장은 계속 쌓였지. 먹은 것은 없지. 결국 쓰러지더라구.
M은 한 겨울에도 더운 나라에 가서 썬탠을 하고 온 것 같은 건강한 피부색을 갖고 있었지만, 몹시도 몸이 약했다. 운동한답시고 수영장에 다니다가 앰블런스에 실려가는 일은 놀랍지도 않은 일이었고, 온갖 보약에 링겔을 몸에 칭칭 감고 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앞으로 네 남편은 병원비 대려면 돈 많이 벌어야 겠다고 농담 삼아 말할 정도였다. 만날때마다 앓는 소리를 듣는 것은 거북했지만, 그렇다고 내가 특별히 그녀를 위해 무언가를 해준 적도 없었기에 뒤돌아서면 잊어버리고는 했다.
그러나, 그 순간만은 M의 몸이 약한 것은 죄악이었다. 그녀는 아파서는 안되는 거였다. 아무리 힘들어도 이를 악물고 씩씩하게 털고 일어나 주변 사람들을 챙겼어야 했다. 그렇지 못했기에 그녀는 이렇듯 원망을 듣는 것이었다.
잠시 침묵이 흐른 것은 다른 날도 아닌, M의 결혼식에 우리가 너무 심한 것이아니었나.라는 뒤늦은 자책감이 들었기 때문이 아니었나 싶다.
/내가 M이 불어 배우는거 도와줬었잖아. 근데, 빠르더라구. 언어적인 재능이 있는 것 같아.
/프랑스 가면 고생할텐데, 큰일이다. 그렇게 몸이 약해서.
나도 뭐라고 말을 거들고 싶었지만, 솔직히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왜 나는 이런 때 빈말도 하지 못하는 멍충이일까.
결혼식을 앞두고 M과 S를 만났었다. 일이 있어서 나중에 도착한 나는 커다란 보따리를 들쳐 메고 온 시내를 돌아 쳤던 터라 피곤이 머리 꼭대기까지 차오른 상태였지만, 결혼을 축하한다고 M에게 진심으로 말했다. 진짜다.
/결혼해서 프랑스로 들어 간다며? 이야..나중에 나 가도 돼?
/그래. 꼭 와. 내가 맛있는 음식까지 해주지.
M은 프랑스에서 건축회사에 다니는 남편과는 별도로 미술 공부를 할 예정이라고 했다. 랭귀지 스쿨을 다니기 위해 입학 절차를 밟는 중이라며, 먼저 프랑스에 갔다 온 경험이 있는 S에게 이것저것 묻고 싶은 것이 많은듯 보였다. 이내 분위기는 나와는 다른 세계에 관한 것들로 이어졌고, 난 그저 허브차를 마시며 묵묵히 듣는 것 이외에는 다른 할 일이 없어졌다.
/결혼 선물로 뭐 받고 싶어? 필요한 거 있으면 말해.
잠시 대화가 끝난 틈을 타서 끼어 들었다.
/오빠가 이미 그곳에 방을 얻어 살고 있기는 한데, 곧 옮길거거든. 필요한건 그때 가서 사려구.
/난 전기주전자가 참 좋던데. 그거 안 필요해?
/야. 프랑스가면 훨씬 좋은거 많아. 싸기도 하구.
살짝 무안해졌다.
/그럼 부부찻잔 같은거..사줄까?
이때 S가 갑자기 생각난듯 말을 거들었다. 자신이 갔었던 어떤 상점에 가면 싸고 고급스러운 그릇이 많다고 했다. M은 눈을 반짝이며 그녀에게 돌아 앉았다. 다시 내가 모르는 먼나라 이야기가 이어졌다.
/아참. 너 결혼식때 운전해줄 수 있어?
/왜?
/결혼식 당일날 야외촬영 하려고 하는데, 차가 1대여서 다 움직이기 힘들 것 같거든.
/싫어.
부탁한 M보다도 옆에 있던 S가 더 당황하며 어머. 너 굉장히 단호하게 거절하는구나.라고 했다.
/나 아침에 못 일어나. 알잖아.
/그럼, 너 디카 있으니까, 스냅 사진 찍어줘.
/싫어.
그들의 얼굴은 뭔가 합당한 이유를 묻고 있었다.
/사진은 S가 더 잘 찍잖아. 또, 너도 디카 있고.
나와 집이 같은 방향인 M과 전철을 타고 오면서도 어색한 침묵은 여전했다. 헤어지기전 M은 신랑이 프랑스에서 들어오는 대로 다함께 식사라도 하자는 말을 잊지 않았고 나도 그러마했다.
/오늘 야외촬영도 못했다고 하더라구. 그럼 어차피 내가 안가도 상관없는 일 아냐? 그런데 왜 안왔다면서 서운한 티를 내냐구.
돌림노래처럼 다시 M을 성토하는 분위기가 도래했다. 나는 슬슬 지겨워지기 시작했다. 그나마 화제를 바꾼 것이 혼수 이야기였다.
/호텔에서 하는 결혼식치고는 좀 그렇지 않았니? 나같으면 그 돈 주고 이런데서 안한다.
/시어머니한테 밍크코트 롱으로 해줬댄다. 이제 여름 다가오는데 웬 밍크코트니? 아까 보니까 키도 작으시던데, 어울리지도 않게.
/예단도 많이 했다면서? 그래도 함들어온거 보니까 다이아몬드 셋트로 받았더라. 꽤 크던데? 한 1캐럿 될라나?
그렇구나. 결혼을 하려면 돈이 많이 드는거구나. 우린 어떻하니. 10년넘게 직장생활을 한 M은 알뜰한 편이니 모아놓은 돈이라도 있을텐데 말야. 두서없이 오가는 대화의 끝이 넋두리로 넘어가버리고, 아. 역시 스트레스는 수다로 풀어야 제맛이야.라는 마무리로 끝을 맺었다.
며칠뒤, S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잘 지내지?
/얼마전에 봐놓구서는 새삼스럽게 뭘.
/하긴. 근데 너 M 전화 받았니? 월요일에 만나자는거?
/아니.
M은 정말 나를 좋아하지 않는건가.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여전히 그녀에게 서운한 맘은 들지 않았다.
/프랑스 가기 전에 다 함께 보자고 그러더라구. 나올거지?
/에..싫다구. 결혼식 간 것도 왜 갔나 싶다. 지금 생각으로는.
/M말야. 나한테 전화하자 마자, 그날 서운했다고 또 그러는거 아니? 정말 웃기지 않니?
그럼 너도 안보면 되잖아.라고 대꾸하고 싶었지만 그저 가만히 듣기로 했다.
/네가 편한가보다. 나한테는 그런 말 안하는데. 하긴. 나보다는 너랑 더 친하잖아.
/아니, 그애는 왜 나한테만 그런다니?
/네가 잘 받아주니까 그렇지. 나한테 그래 봐라. 내 입에서 고운 소리 나오니?
/어쨌든, 그날 나와라. 나만 가는거 싫단 말야.
/J도 나올거 아냐. 그럼 됐네. 난 안간다.
약속이 있다던 월요일, M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오늘 시간 있어? 인사동쯤에서 모두 함께 저녁 같이 먹자.
/어..미안. 나 집에 일 있어서 못 나가는데. 오늘 못보면 평생 못보는 것도 아니잖아. 내가 곧 프랑스 뜬다. 그때 보자.
/그래? 그럼 할 수없지 뭐.
약속시간 30분전. S로부터 다시 전화가 걸려왔다.
/너 안 나가? 1시간 넘게 걸리잖아.
/30분 늦춰졌어. 웃겨. 정말. 진짜 나가기 싫어. 너 진짜 안 나올거야?
/안나갑니다. 더 이상 말씀하지 마십시오.
며칠뒤, M으로부터 이메일이 도착했다. 프랑스에 무사히 도착했다는, 여러분이 보내주신 관심과 사랑을 절대 잊지 않겠다는 감동적인 내용이었지만 단체메일임이 뻔히 드러나는 수십명의 주소탓에 제몫을 해내지 못하고 있었다. 마침 난 거나하게 술을 마신 상태였던터라 없는 감정을 끌어모아 정성어린 답장을 보냈다.
/나 프랑스가면 재워 줘야 한다.
M은 프랑스에서 살던, 어디에서건 징그럽게 오래 살거라는 믿음이 생긴다. 아마도 결혼식때 들었던 이야기만으로도 적어도 30년은 수명이 늘었을 테니. 그 날 이후, J, S와는 연락이 끊겼다. 아마도 누군가의 결혼식때나 다시 보게 되겠지. 그나저나 내 결혼식때는 그들 발목에 끈을 묶어 내 허리에 감아놔야 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