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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 발견

당신이 잠든 사이

by iamlitmus 2007. 3. 26.
오지랖씨는 끝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잠을 청하려고 애를 쓸수록 점점 더 정신이 맑아 질뿐이었다.
아내는 가늘게 코까지 골면서 잠들어 있다.
오지랖씨는 그런 그녀가 부럽기도 하고 자신에게 무관심한듯한 아내를 한 대 쥐어 박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대신, 가벼운 한숨을 내쉬고는 조용히 베란다로 나가 유리문을 약간 열고 서서 크게 심호흡을 해본다. 동이 트기까지는 아직도 많은 시간이 남아 있었지만 그가 살고 있는 아파트 단지는 초저녁처럼 밝기만 하다.
‘쯧쯧..저렇게 전기를 마구 써대니..자기 것이 아니라 이거지..큰일이야.큰일...’
몇 미터 간격으로 세워져 있는 가로등의 불빛이 어제 오늘 일도 아니었건만 언짢은 그의 눈에는 지나치게 밝아만 보였다.
어떻게든 다시 자야겠다고 생각한 오지랖씨는 거실로 들어서려다 갑자기 들려온 커다란 고함소리에 내딛던 발을 멈추었다. ㄷ자형으로 둘러싸인 아파트 단지의 모양이 메아리를 만들어 주고 있는데다가 무언가 심하게 부딪히는 소리까지 나고 보니 뭔가 일이 크게 벌어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베란다 난간을 붙잡고 몸을 내밀어 봤지만, 안경을 쓰지 않은 탓에 사물의 구별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미간을 찌푸려 눈에 힘을 주자, 그제서야 희뿌연 무언가가 이리저리 활개를 치며 발길질을 해대고 있는 것이 보였다. 대충 짐작을 해보니 수위실 바로 옆에 있는 차량 차단기인 듯 싶었다.
‘아니, 저게 뭐하는 짓이야. 그리고 경비원은 뭐하는 거야. 저러다 다 부숴 뜨리겠네.’
경비실의 불빛은 꺼져 있었고 한참을 지켜봐도 누구 하나 나와보는 이가 없었다. 경찰에 신고할까도 생각해봤지만 그 전에도 가끔씩 술 취한 사람들이 소리를 질러대다 마는 경우가 있었기에 조금 더 기다려보기로 했다.
그런데, 그 기세가 조금도 줄어들지 않고 점점 더 과격해지는듯 싶자 오지랖씨는 자신이 직접 나가 보기로 결심했다. 어차피 여러 명도 아닌 한 명인 듯 싶었고 무엇보다도 주민의 공동재산을 고장 내기 전에 말려야 한다는 생각이 앞섰다.
오지랖씨가 다가갈때까지도 누군가의 난동은 변함없이 자행되고 있었다. 집에서 보던 때와는 달리 덩치도 훨씬 크고 휙휙 날 듯 발차기하는 품새가 보통사람이 아닌듯 싶었지만 자신이 그보다는 어른임을 상기하고는 배에 힘을 잔뜩 불어넣었다.

/이봐요. 젊은이. 지금 뭐하는 건가. 그러다가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구.

순간, 홱 돌아선 젊은이의 성난 눈길이 오지랖씨의 온몸을 휘감아 돌았다. 짧게 자른 스포츠머리는 일명 깍두기 스타일인데다가 짧고 굵은 목줄기와 가뿐 숨을 몰아 쉬는 가슴팍, 바짓단을 꽉 조이는 굵은 허벅지는 이 모든 것이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넌 뭐야.

훅 끼쳐나오는 술냄새와 험상궃은 얼굴에 저절로 고개가 돌려질 뻔 했지만, 겁을 먹었다고 여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숨을 꾹 참고 견뎌냈다.

/술 좀 마신 것 같은데, 얼른 집에 들어가야지.
/이 자식이, 내가 술 마시는데 네가 보태줬어? 어디서 하라 마라야.
/아니, 이 사람이. 아무리 취했다고 그렇게 함부로 말을 하나? 어른이 타이르면 부끄럽게 생각해야지. 빨리 가지 못ㅎ..어..어어..

미처 말을 끝맺기도 전에 목덜미를 틀어 잡힌 오지랖씨는 상대방이 술에 취한 척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술냄새만 난다 뿐이지 한 손에 몰아 잡힌 아귀힘은 그의 몸이 번쩍 들릴 정도로 엄청났던 것이다. 점점 호흡이 가빠지고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혀 오자 오지랖씨는 손발을 마구 휘젓기 시작했다. 무작위로 빗나간 헛손질에 얼굴을 피하느라 그 남자의 힘이 잠시 느슨해졌다 싶자 힘껏 뿌리치고 뒤로 물러난 오지랖씨는 자신의 목을 부여잡고 한참동안 켁켁거렸다. 허리를 펼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러운 가운데 이제는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해야만 한다는 절박함이 머리를 가득 채웠다.

/어구구구..어구..

오지랖씨는 너무도 아픈 나머지 자신도 모르게 소리를 지른 것이 아닌가 싶었으나 그것이 자신이 아닌 그 남자의 입에서 나오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잠시 어리둥절해졌다.
/어구. 이놈이 사람 치네. 나 죽는다. 사람 살려.
어디선가 나타난 경비원은 슬금슬금 다가와 오지랖씨와 그 남자를 살펴보고 있었고 이를 본 그 남자는 아예 데굴데굴 구르기 시작했다.

/앰블랜스 불러. 경찰도 불러. 어구. 나 죽네.

영문도 모른채 서있는 오지랖씨와는 상관없이 모든 처리는 신속하게 진행되었다. 채 5분도 지나기 전에 경찰이 도착했고, 뒤이어 앰블런스가 그 남자를 실어갔다. 목격자의 자격으로 동행한 경비원과 함께 파출소에 끌려간 오지랖씨는 한참이 지나서야 자신이 폭행혐의로 구속될 지경에 처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아. 그러니까 그게 아니라니깐요. 그 사람이 술취해서 차단기를 부수려는걸 막으려다 제가 오히려 맞았어요. 그 사람 혼자 쇼 하는거예요.
/진단 결과가 나와봐야 아니까 일단, 집에 가서 연락을 기다리세요.

경찰은 최대한 짧고 냉정하게 오지랖씨를 대했고 그 이상의 어떤 변명도 자신에게는 통하지 않을 것임을 내비쳤다.
서서히 동이 트고 있었지만 오지랖씨에게는 암흑 같은 밤이 계속되는 듯했다.

갈비뼈 2개가 금이 갔다고 했다. 합의금 천만원을 내놓지 않으면 폭행치사로 구속될 것이라는 날벼락을 접한 오지랖씨는 자신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사실이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쓸데없이 그것도 오밤중에 나가 얻어맞고 다니냐는 아내의 비아냥거림을 억지로 삼킨  오지랖씨는 그날로 몸져 눕고 말았다. 경찰서 출입 기자인 처조카에게서 연락이 왔다.

/그 놈이 아주 상습범이더라구요. 해달란대로 해줬다가는 큰일나겠어요.
/그럼 어떻해. 당장 구속이라는데.
/일단,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마세요. 원래 협박하는 쪽에서 몸이 달게 되있어요.

길 건너 임대아파트에 산다는 그 남자는 일정한 직업이 없는 말 그대로 날건달이었고 그런 그를 견디지 못한 마누라는 아이를 데리고 일찌감치 친정에 가서 지낸다고 했다. 홀어머니 또한 그의 난봉질을 보다 못해 시골에 내려가 텃밭이라도 일구며 산다며 떠난후 연락을 끊고 사는 지경이라고 했다.  같은 동네에서도 도리질을 칠 정도로 거칠기가 한이 없고 막가파라고 했다.

우리집은 노인들이 사는 집이라 천만원은 커녕 천원도 아쉽다. 늙어서 기동조차 하기 힘드니 징역을 살다 죽이던지 말던지 맘대로 하라는 아내의 싸늘한 대꾸에 경찰서 측에서도 더 이상 말을 하지 않는 눈치였다.
일주일 후, 400만원까지 합의해주겠다는 전화가 걸려왔다.

/아. 글쎄. 우리는 땡전 한푼 없다니깐요. 잡아가요. 잡아가.

일부러 그러는 것을 알면서도 아내에 대한 서운함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다. 끙하고 뒤돌아 눕는 오지랖씨의 등이 새우마냥 옹색스러웠다.

/300만원까지 봐주겠대요. 여기서 합의 안하시면 정말 구속됩니다.

처조카도 그정도면 많이 물러선 편이니 그쯤에서 합의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내놓았다. 아내가 몰래 붓던 계를 깨고, 급히 주변의 돈을 끌어 모은 300만원을 경찰서에 건네주고 오는 오지랖씨의 마음은 작대기로 마구 휘저어놓은 흙탕물같이 탁해질 수밖에 없었다.

/내가 동네 부끄러워서 밖에도 못나가요. 돈을 벌어다줘도 시원찮은판에 이게 무슨 난리래요. 오늘부터 당신, 집에서 꼼짝도 하지 말아요.
/아니..이 사람이 말을 해도..
/내가 틀린 말 했어요? 밤에 잠이나 잘 것이지 나가기를 왜 나가. 그리고 남이 차단기를 부수던지 말던지 놔둘 것이지 엄한 참견을 해가지고 생돈 들게 해요.

속에서 울화가 치밀었지만 아내가 한 말이 하나도 그른 것이 없다 싶자 입술만 달싹일뿐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는 오지랖씨였다.

/알고보니까 그 인간 마누라고 애고 다 거짓말이래요. 갈비뼈도 전에 부러진 건데 아직 아물지 않은 걸 물고 늘어진거야. 당신. 재수없게 걸린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