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부터 엄마는 눈이 침침하다고 했다. 자주 충혈도 되고, 눈물이 난다고도 했다. 수영장물때문이 아닐까. 안약 넣었어? 라고 물으면서도 엄마 눈을 쳐다보지도 않고 TV만 바라봤었다.
며칠뒤, 엄마는 아무래도 안되겠다고, 안경을 맞춰야겠다고 했다. 나는 이왕이면 좋은 걸로 맞추라고 말하면서, 내가 사주겠다고, 떵떵대는 것은 빼먹지 않았다. 다음날, 엄마는 길거리에서 파는 3천원짜리 돋보기 안경을 사들고 와서는 잘 보인다고, 아주 잘 보인다고 몇 번이고 말씀하셨다. 나는 엄마는 왜그래. 내가 사준다고 했잖아.라고 말하고는 3초정도 속상해하다가 그 뒤로는 까맣게 잊어버렸다.
동네 안과에 다녀오신 엄마는 혈압 때문에 시력이 나빠진거라는 의사의 진단결과를 받아 들고서 당혹스러워 했다. 꼬박꼬박 혈압약을 먹고, 밤마다 숨이 차게 운동을 해도 엄마의 혈압은 바닥을 보는 시늉조차 할 줄 몰랐지만, 이렇듯 눈까지 나빠질 줄은 몰랐다고 중얼거리셨다. 얼마전, 아빠와 처음으로 해외여행을 떠날 때도, 별다른 질병이 없냐는 직원의 물음에 몇만 피트 상공에서 혈압이 뻗쳐 오를지도 모른다는 말은 죽어도 하지 않았던 엄마는 필요한 약은 다 챙겨왔다며, 하나도 걱정하지 말라고 씩씩하게 말했었다.
집앞에 다다랐을즈음, 핸드폰이 울렸다. 집이었다. 끼니때만 되면 전화하는 엄마인줄 알고,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왜 전화한거야~’라고 애교를 떨며 현관을 들어섰다.
내 방에서 컴퓨터앞에 앉아 있던 아버지가 수화기를 미처 내려놓지도 않은 채 인터넷 바둑이 안되서 전화한거라고 말했다. 엄마는 없었다.
/엄마 눈 큰일났다. 병원에 갔는데 왼쪽 눈은 시력이 아예 안나온대.
프로그램을 새로 설치하던 나는 너무 놀라 아버지를 쳐다봤다.
/그렇게 안좋아?
/응. 하옇튼, 그렇게 병원에 가라고 했는데도 죽어도 안가더라니..
/병원에 같이 갔었어?
/응.
/엄마는?
/병원에.
/근데, 왜 아버지 혼자 왔어?
/아유..너무 지루해서 기다릴 수가 있어야지. 어떻게된게 사람이 줄어들지가 않아.
기가 막혔다. 뭐라고 더 보태봤자 소용없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억지로 꾹꾹 참으려니 가슴 한켠이 묵직해져왔다. 오빠한테 전화를 걸었다. 길게 말하면 눈물이 나올 것 같아, 간단하게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오빠는 잠시 생각하는듯 하더니, 알았다고 했다. 내 방에서는 아버지가 바둑을 두는 소리가 들려왔다. 딱.딱. 바둑알 놓는 소리가 크게 점점 커져 갔다.
저녁에 잡혀 있던 약속을 취소하고, 가만히 앉아 있으려니 점점 미칠 것만 같아, 이리저리 움직이며 손에 잡히는 대로 청소를 했다. 잠시후, 엄마가 들어 오셨다.
/병원에서 뭐라고 그래?
엄마는 손에 든 빵봉지를 놓지 않은 채, 우물거리며 말했다.
/어제부터 크림빵이 먹고 싶어서 사왔어. 먹을래?
/아유..좀... 의사가 뭐라고 그래?
/음. 백내장이래. 수술해야 한대.
내일이 토요일이래.라고 말하듯 엄마는 너무도 선선하게 대답했다.
백내장이 어떤 질병인지, 어떻게 고쳐야 하는지 당장 알아보고 싶었지만, 그 순간 아버지는 누군가와 아주 중요한 바둑경기를 벌이고 있었다. 아빠는 책상에 두 발을 올려 놓은 채 신중하게 바둑알을 놓으며 엄마에게 물었다.
/그래서, 고칠수 있대?
/내일 예약하고, 수술날짜 받으면 된대.
눈에 너무 힘을 주니, 바늘로 찌르는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나는 얼른 뒤돌아서서 저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엄마와 눈이 마주치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생선을 굽고, 된장국을 데우고, 반찬을 꺼내 식탁 위에 올려 놓았다.
백내장 수술 전력이 있는 이모할머니와 통화하는 엄마 목소리가 들렸다.
/이모, 수술하면 어때요? 다 낫는거죠? 나 지금 버스 번호도 안보이고, 손톱도 못 깎겠어. 한달? 그렇게 오래 걸려요? 그래. 눈이 침침하다니까. 안개가 낀 것 같애.
/이모가 그러는데, 한달동안은 밖에도 나가지 말고, 머리 감을 때도 조심해야 한다네. 이제 네가 고생 좀 해야겠다.
/당연히 해야지. 오랜만에 딸 노릇 좀 하라고 그래.
구운 고등어를 식탁에 놓자마자, 엄마는 젓가락으로 잘게 찢어 아버지 앞에 옮겨 놓았다. 한 조각을 삼킨 아버지는 간이 맞지 않는다며, 당신은 얘한테 이런 것 좀 똑바로 가르치라고 덧붙였다. 아무말 하지 않고 맛소금을 그 위에 살살 뿌리고 나서야, 평온한 식사가 이어졌다.
설거지를 하고 난 뒤, 가스렌지 덮개를 들어올려 세제를 잔뜩 묻혀 박박 문질렀다. 다 씻어낸 뒤에도 속이 풀리지 않아 더 닦을 것이 없나 둘러보는데, 거실에서 TV를 보고 계시던 아버지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으하하하..저놈 봐라..으하하하..
친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며칠 전부터 잡혀 있던 약속이 하필이면 오늘이었다. 집안 일때문에 안되겠다고 말한뒤 전화를 끊었다. 잠시후 여자후배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얼굴 본지 오래됐다고, 한시간만이라도 있다 가면 되지 않느냐고, 봄날 햇살 같은 웃음소리를 들려주었다. 다시 걸려온 친구의 전화를 받고서 곧 가겠다고 대답했다.
밤10시가 넘은 시간이었지만, 파헤쳐지지 않은 서울바닥이 없는 탓에 지루한 차량행렬이 이어지고 있었다. 내부순환도로에 들어서자 조금씩 속력이 붙기 시작했다. 주위의 분간이 되지 않을 정도로 모든 것이 빠르게 지나쳐 갔지만, 생각은 정반대로 천천히 움직였다.
그 누구의 탓도 아닌 것을 알면서도, 왜 난 아버지만 원망하는걸까. 내가 느끼는 죄책감을 떠 넘기기 위해 가장 쉬운 방법을 택한 것은 아닐까. 나 뿐만이 아니라, 아버지도, 오빠도, 다른 가족들 모두 엄마를 염려하는 마음은 똑같은데, 왜 나만 유난을 떨어대며 수선을 피우는 걸까.
미처 정리되지 않은 마음을 안고서, 친구집에 들어섰다. 대전에서, 의정부에서 일부러 달려온 친구들과, 처음 대하는 낯선 얼굴도 보였다. 후배의 남자친구라고 했다. 다른 친구들과는 안면이 있었던듯 그리 어색해하지 않고 어울리는 듯 했지만, 서먹함을 없애기 위해 내가 먼저 설레발을 칠 마음까지는 생기지 않았다. 주된 화제는 스포츠였다. 진정한 스키어의 꿈은 캐나다의 어떤 지역인데, 눈부터 차원이 다르다. 다음 시즌때는 대명으로 정하자. 인라인을 타면 쓰는 근육도 비슷해서 스키연습에도 좋다. 가라앉아 있는 내 기분을 그들에게까지 전염시키고 싶지 않았기에 조용히 사이다를 마시며 이야기를 듣던중에 후배가 엄마의 안부를 물어 주었다. 뒤이어 친구들도 자신의 부모님의 경험을 말해주며, 그리 심각한 것은 아니라고, 걱정하지 말라고 위로를 해주었다.
먼저 일어나서 미안하다고 말한 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친구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이제 막 재밌어지려고 하는데, 먼저 가서 섭섭하다. 야.
/왜.. 지금부터 가족 오락관 게임이라도 하려고 했어?
/먼길 오느라 수고했다. 조심해서 가라.
친구들과의 만남으로 인한 무엇 때문이 아닌, 일순간에 정리가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서서히 마음이 편해졌다. 이제부터 내가 할 일이 무엇인지 점점 분명해지고 있었다.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 단 한번 후진으로 차를 주차시키면서, 새삼스레 내 자신에게 감탄했다. 난 왜 이렇듯 잘하는게 많을까. 이제 엄마한테 그 소리를 듣는 일만 남았다.
생활의 발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