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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발견

<신탁의 밤> 폴 오스터

by iamlitmus 2007. 3. 26.
한때, 폴 오스터의 소설에 빠진 적이 있었다. 빠른 스토리 전개와 다양한 인물들이 엮어내는 기괴한 사건들, 차원을 넘나드는 상상력은 마치 내 손에 책이 달라 붙어 있는 것 같은 마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출판사의 잇속을 드러낸 기대이하의 몇몇 작품들이 연이어 출간되면서부터 내 관심밖으로 밀려나고 말았다.(하루키가 그랬고, 최근에는 나쓰메 소세끼가 함부로 다뤄지고 있다. 류의 책은 놀라울만큼 자주, 많이 나오고 있다.)

그러나, '신탁의 밤'은 오랜만에 접하는 제대로 된 폴 오스터의 소설이다. 과거, 현재, 미래가 맞물린 시간적 공간에서 과거 속의 현실이 미래를 암시하고, 자신은 깨닫지 못하고 있지만, 분명히 알고 있는 사실들이 짧은 시간동안 연이어 일어났을 때, 과연 주인공이 선택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아..복잡하다.) 초반부에서는 이야기의 초석을 깔아 놓는 작업이 매우 천천히 진행되기 때문에(덧붙여 기나긴 주석이 몇 페이지에 걸쳐 나오기도 한다.)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자. 이제 한번 시작해볼까. 정도가 되는 1/3지점부터는 롤러코스터의 속도에 버금갈 정도로 빠른 진행을 보여준다. 그러나, 막판 반전이 안겨주는 폭풍우에 비하면 앞부분의 얕은 흥분은 아무것도 아니다.

작가인 주인공은 4개월 전 불의의 사고를 당한 뒤,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회복을 위해 매일매일 산책을 하던 그는 장.이라는 중국인이 운영하는 문구점에서 포르투갈산 파란 노트를 구입하게 된다. 그는 이 노트의 첫장을 아내의 대부이자 유명한 소설가인 존.이 들려준 에피소드를 각색하는 것으로 시작하게 된다. 자신도 미처 깨닫지 못했던 열정과 파란 노트의 신비한 힘에 의해 일사천리로 진행되던 작업은 어느 순간 벽에 부딪히게 되고, 그때부터 주인공의 모든 생활은 완벽하게 뒤집어지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