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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 발견

강남예찬

by iamlitmus 2007. 3. 26.
콜라반, 소주반을 섞어 마신 덕에 기분좋은 취기가 올랐다. 올라탄 택시 뒷자석에 몸을 던지니 그제서야 나른한 피곤함이 몰려들었다. 열어놓은 창문으로는 한낮의 폭염과는 전혀 무관한것처럼 시침을 뚝 뗀 선뜻한 강바람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날씨가 좋죠?
모든 대화는 날씨이야기에서 시작된다. 기사 아저씨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서 계속 말을 이어나갔다.
/강북에서 사세요? 강북 살기 힘들지 않아요?
/그렇죠. 사람도 많고, 차도 많고..
/뭐..강남도 마찬가지지만 강북하고는 좀 다르죠. 한번 강남에서 살아본 사람들은 이사갔다가도 다시 돌아올수 밖에 없어요. 강남이 뭐든지 비쌀거 같죠? 안그래요. 우리같은 평민들은 엄두도 못 낼 물건들도 얼마든지 싸게 살수 있거든요.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간다 싶었지만 가끔씩 아..네..정도의 지청구만 갖다 붙이기로 했다. 난 예의바른 사람이다.
/청담동에 가면 부띠끄가 많아요. 거기 옷 진짜 비싸거든요. 보통 200만원정도니까. 그런데, 세일기간만 잘 택하면 보통 4-50%는 할인해서 살수가 있어요. 최수아 부띠끄라고 들어봤죠? 얼마전 부도가 났는데 아..글쎄 한벌에 15만원씩 팔아제끼는 거예요. 내가 우리 마누라랑 같이 가서 봤는데 원단이 달라. 영국제랑 이태리제더라구.

이제 기사 아저씨는 흥에 겨운 리듬에 올라서 있었다. 즐거운 기억이었던 듯 목소리엔 새삼스런 기쁨이 넘쳐났다.
/그래서 내가 6벌 사줬어요. 기껏해야 90만원이잖아요. 제 값주고 사려면 천만원이 넘는데 진짜 횡재한거죠. 그리고 우리 마누라가 패션 감각이 좀 뛰어나요. 그 옷을 입고서 동네를 돌아치는데 모두들 난리가 났대요. 난리가..강남에 사니까 그럴수 있었지, 강북에서는 어림도 없는 일이예요.

택시는 남산터널을 지나 청계고가로 접어 들고 있었다.
/강남은 말이죠. 가로등 불빛도 환해요. 역시, 돈이 많은 지역이라서 그런지 주민들의 복지에도 투자를 많이 하거든. 난 이제 강남 떠나서는 못 살거 같애요.
30년 넘도록 어두침침한 가로등만 보면서 살고 있는 나는 어둠의 자식이었나보다. 창밖으로는 동평화시장의 음침한 건물들이 줄지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큰딸이 취직을 안해서 미치겠어요. 뭐..능력이나 외모가 딸리는게 아니라 외국유학 같다와서는 아나운서만 하겠다고 그러니..
아저씨의 자식들이 많지 않기만을 바랄뿐 내가 그 상황에서 할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교회 집사님 아들중에 9년차 pd가 있다고 해서 데려가 보여준 적이 있어요. 그랬더니, 자기는 분야가 다르다면서 아는 아나운서를 바로 부르더라구. 꼼꼼히 뜯어보더니, 얼굴도 조그맣고, 목소리도 좋고하니까 될 것 같다고 그러대요. 아..물론 시험도 봐야겠지만, 지가 노력도 하고 똑똑하기도 하니까 내년쯤에는 될성 싶어요. 그래서 내가 천만원 대출 받아서 턱 내놨어. 이 돈 가지고 아카데미인지 뭔지 다녀서 꼭 하고 싶은거 하라고.

난 고개를 돌려 아저씨를 쳐다봤다. 어두웠음에도 불구하고 새카맣게 그을린 얼굴임을 알수 있는 얼굴은 튀어나온 광대뼈밑의 그늘에 파묻혀 있었고 왕골시트에 기댄 그의 좁은 어깨를 감싸고 있는, 새벽추위를 막기위한 것인 듯한 보풀투성이의 조끼는 제 무게감도 잊은채 심하게 펄럭대고 있었다.

/둘째는 지금 교환학생으로 캐나다 가있어요. 나 그애는 진짜 걱정안해요. 욕심이 많기도 하지만 제일 똑똑하기도 해서 그..뭐냐..회계사인데..
/AICPA요? 국제 공인 회계사.
/응. 그거 공부하고 있어요. 난 바라는거 아무것도 없어요. 그저 자식농사 잘 짓는거 말고는. 근데, 아들녀석 하나가 골치예요.

어디에나 집안에는 골칫덩이가 하나쯤은 있는 법이다. 나는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그 아들에게 동료의식을 넘어선 친밀감마저 느낄 뻔했다.
/그냥 전문대 보냈어요. 그나마도 후보에서 간신히 턱걸이로 붙었어요. 부동산학과라는데 일반 대기업에서 월급쟁이로 사느니 부동산 하나 차려주자 생각했어요. 그게 낫지 않아요?

뭐라고 대답하지 않으면 안될 찰나, 다행히 집앞에 당도했다. 단지까지 들어가지 않아도 된다는 내말에,
/이쪽으로 내려가야 다시 강남으로 갈 수 있어요. 삼양동, 미아리 쪽으로 들어가기 싫거든요. 여기 잔돈이요.

400원의 잔돈을 꼭 쥐어주고서는, 강남의 자랑스런 주민인 기사아저씨는 그렇게 황급히 떠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