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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 발견

손님

by iamlitmus 2007. 3. 26.
/4형제중의 막내라더라. 34살이래. 개띠가 너랑 맞나? 자기 집도 사놓았댄다.
실로 간만에 들어온 선자리였기에 엄마의 목소리는 기쁨에 들떠 있었다. 이 때가 중요하다. 내가 어떻게 대답하느냐에 따라 앞으로 며칠동안의 집안분위기가 결정된다. 잠자코 있는 내가 답답했는지 엄마는 한층 더 열정어린 목소리로 덧붙이셨다.
/디자이너래. 의상 디자이너. 낮에는 회사 다니고, 저녁엔 명동에 있는 자기 매장을 운영한대. 한번 만나볼래? 이번주로 잡을까?
계속되는 내 침묵에 엄마의 표정과 목소리는 넋두리&협박모드로 전환된다.
/남들은 연애질도 잘하더만, 넌 도대체 그동안 뭐했어? 내가 부끄러워서 누구한테 말도 못해. 하옇튼 이번해 안에는 꼭 결혼할수 있게 해.

다음날, 내게 쥐어진 사진속의 그는 어색하게 웃고 있었다. 내 사진 또한 그의 손아귀에서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을 것이다. 이것이 운명이라면 받아들여야만 하겠지요라고 말하기엔 아직도 나의 이상은 저 푸른 초원위를 배회하고 있었지만, 그보다는 가까이에 있는 엄마가 더 무서웠기에 짐짓 설레는 얼굴까지 보여줄수 있었다. 금요일 저녁, 의외의 소식이 날아들었다. 그의 어머니가 우리집을 방문하고 싶어한다는 것이었다. 근처에 딸이 살기 때문에 겸사겸사해서 들르겠다는 이유였지만, 우리집 사는 모양새도 보고, 무엇보다도 나를 먼저 보고 나서 금쪽 같은 자신의 막내아들에게 넘겨줄지 말지 결정하겠다는 것으로밖에 해석되지 않았다.
/당장 그만둬. 안해.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봐. 엄마라면 그렇게 할수 있겠어?
/못하지. 하지만..
/됐어. 없던 일로 해.

지난밤 아빠는 아랫목에 커다란 구렁이가 또아리를 틀고 앉아 있길래 잡을까말까 망설이셨다는 꿈을 꾸셨다. 구렁이를 돈으로 해석해서 복권을 사자고 하는 나와는 달리 엄마는 그 선자리야 말로 알짜배기가 아닌가하는 절대해석을 주장하셨다. 또한, 그쪽에서 계속 전화가 걸려와 제발 한번만 보게 해달라고 사정하는 형편(순전히 엄마만의 착각이라고 말했지만)이니 한번 초대하자는 쪽으로 귀결지어졌다.

약속날짜인 토요일에 앞서 우리집은 대청소에 들어갔다. 이불빨래와 겨울옷 정리, 베란다에서부터 다용도실에 이르기까지의 번쩍거림은 이를 앙다문 엄마가 일궈낸 산물이었다. 책더미가 잔뜩 쌓여있는 내 방은 어떻게든 손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지만 폭풍우처럼 휘몰아치는 엄마의 재촉아래 마치 도서대여점 같은 깔끔한 분위기로 돌변하고야 마는 기적을 낳았다.
화장 잘 먹도록 일찍 잠들라는 엄명에도 불구하고 여느때와 다름없이 밤을 꼴딱 세우는 내게 분주한 엄마의 움직임은 새벽까지 이어졌다.
그녀를 대접하기 위한 음식은 콩고물을 듬뿍 묻힌 쑥찰떡과 밤새 발효시킨 식혜, 1년에 한번 먹을까 말까한 파인애플을 비롯하여 거의 명절을 방불케하는 메뉴가 준비되어 있었다.
다음날 아침, 이왕 이렇게 된거 똑소리나게 해보자는 오기가 든 나는 공들여 화장을 하기 시작했다. 사나워 보이는 눈꼬리를 끌어내리고, 대다수의 어머님들이 좋아하는 진달래빛 꽃분홍 립스틱을 발랐다. 심혈을 기울여 드라이를 한 뒤 이에 어울리는 옷차림까지 끝마쳤을 때 문제의 손님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한시간뒤면 도착할것이라는 확인전화였다.
/말투도 공손하게 하고, 예쁘게 웃어.
/키가 얼마냐고 물으면 170 조금 넘는다고 해. 너무 크면 싫어해.
난 내 맘속의 불끈거림에 대해서는 전혀 내색하지 않기로 했다. 엄마가 어떤 요구를 해도 전부 들어드리는 것이 내가 엄마에게 해줄수 있는 마지막 효심이라고 생각했다.

약속한 시간이 한참이나 지났을 때 전화기가 울렸다.
/왔나부다.
불편한 다리로 달려가 받은 전화는 과연 그 손님이었다.
/네? 네에..아..그래요..
분위기가 이상했다.
/아니..아드님한테 말씀 안하셨던거예요? 아..네..
/아뇨. 미안하긴요. 그럴수도 있죠. 그러면 사진 돌려주세요. 네..월요일에 뵐께요.
아무말도 하지 않고 의자에 앉는 엄마의 얼굴엔 뭐라 형용키 어려운 분함이 서려있었다. 난 사태를 진작에 파악했지만 가만히 있기로 했다.
/아들한테 어디에 가는거라고 말했더니 펄쩍 뛰면서 못가게 한대.
나는 기쁘기 그지없었지만, 엄마의 실망스런 얼굴을 보니 사진속의 그와 그의 어머니에 대해 몹시도 분개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엄마. 그것봐. 안될려고 이러는거야.
/그랬나부다.
/엄마.. 쪽팔리다.
/…응...

문제는 엄마가 이 사실을 올케언니에게 말했고, 올케언니가 친정엄마한테 전했고, 오빠에게도 당연히 전해진 덕분에 모두들 그 결과에 대해서 궁금해한다는 것이었다.
/어때? 맘에 들었어?
/네? 아..그게..
/우리 딸맘에 안든대요.
/아유..사돈처녀. 너무 고르지 말아요. 눈이 너무 높은거 같애.
/네? 아..저..
/자기맘에 들어야지, 부모들이 안달한다고 되나요.
평소에는 술술 거짓말을 뽑아내던 나답지 않게 더듬거리는 나를 대신해 엄마가 대답하셨다. 실로 눈물겨운 모성이 아닐수 없었다.

일요일 오후, 엄마는 달디단 오수를 즐기시는 중이고 난 그날의 여파로 인해 여전히 풍성함을 유지하고 있는 냉장고를 각개격파하고 있었다. 점심은 멸치국물과 해물다시다를 진하게 우려낸 칼국수. 그 날 이후로 우리 모녀는 서로 약속이나 한듯이 그 손님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고 있었다.
/칼국수 국물 시원하지?
/응. 면발이 쫄깃하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