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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발견

호텔 아이리스 [오가와 요코]

by iamlitmus 2007. 5.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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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M의 최고봉이라 일컬어지는 무라카미 류에 비하면 소프트한 수준이지만, 어쨌든 이 책은 죽었다 깨어나도 이해되지 않는 SM을 중심에 두고 있다. 자신의 눈앞에서 어처구니없는 사고로 목숨을 잃은 아내와 한순간 아내 대신 조카의 죽음을 선택했던 것에 대한 죄책감때문이라고는 하지만, 그에 대한 분출을 왜 아무 것도 모르는 어린 여자애한테 하고 지랄이얏!! 어른이 괜히 어른이야? 나잇살이나 먹었다는 사람이 말야, 앞뒤도 구분못하고서는 말야, 변태도 그런 변태가 없어요, 아니, 실컷 이상한 짓 해놓고, 이쁘다느니, 미안하다느니 씨부렁대고 말야, 차라리 처음부터 끝까지 두들겨 패던지, 아주 진상중에서도 개진상이예요. (...이런... 나도 모르게 흥분해버렸다. 진정.진정)

어쨌든, 오가와 요코는 '박사가 사랑한 수식'이라는 유명한 책을 쓴 작가다.(흥. 안읽었다. 드라마도 안봤다.) 숫자를 매개로 인간에 대한 절대적 이해와 사랑을 읊었던 작가가 갑작스레 SM을 쓴 이유는 무엇일까. 편집자의 변에 의하면 폭력의 정점에서 해방과 희망을 얻을 수 있고, 이 또한 사랑의 형식이기 때문이란다.

자. 어디 그런가 보자.
휴가철에만 붐비는 해변가 근처 모텔에서 엄마와 함께 살고 있는 소녀는 카운터도 보고, 심부름도 하면서 무료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엄마는 딸을 학교에도 안보내고, 돈독만 잔뜩 들어있는 배울 점이 하나도 없는 여자다. 같이 어울리는 친구아줌마라는 사람도 손버릇이 나쁘고, 영혼이 탁한 여자다. 소녀의 아버지는 어렸을 적 술먹고 싸우다가 맞아 죽었다. 소녀의 정신세계는 안봐도 뻔하다.

러시아어를 번역하는 남자는 아내가 죽은 뒤로 섬에 살면서 폐쇄된 세계에 살고 있다. 그렇다고 거창한 문호의 작품을 번역하는 것도 아닌, 상품설명서나 편지를 번역하는 수준일 뿐이다. 소녀의 모텔에서 창부에게 SM을 하려다가 싸우는 바람에 소녀와 처음 마주하게 된 남자는 이후 우연히 소녀와 조우한 뒤 그녀에게 편지를 보내기 시작한다.

남자의 숨겨진 분노와 표현은 정지된 것만 같던 소녀의 세계를 송두리째 뒤흔들어 놓는다. 소녀는 극에 달하는 자기혐오와 폭력속에서 그릇된 희열을 맛보게 된다. 과연 남자는 소녀를 사랑한 것일까. 마찬가지로 소녀는 이 남자를 사랑한 것일까. 남자는 자신의 아내가 죽었을 때도, 소녀를 통해 그 죄책감을 덜어낼 때도 언제나 비겁했다. 남자를 통해 다른 세계로 다가가려 했던 소녀 또한 어리석었다. 그들은 사랑을 한 것이 아니었다. 서로 다른 생각을 갖고 각자 자신의 욕망을 뒤쫒았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