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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의 발견

짦은 외출

by iamlitmus 2007. 3. 26.
동네에 대형 갈비집이 오픈했다.
지상 4층의 휘황찬란한 조명에 명가임을 알리는 대형간판, 쉴새없이 드나드는 자동차의 행렬이 끊이질 않았다.
/오픈 기념으로 갈비탕이 3천원이라더라.
/그래? 그럼 식구끼리 가지뭐. 일찍 들어올께.

외출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날이 훤할때 들어가는 일이 거의 없던 탓에 중간에서 내려 교보문고에 들렀다. 한참동안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책을 보고 있는데 엄마한테서 전화가 걸려왔다.
/오늘 외식한다고 했잖아. 왜 안와?
지나가듯 말하는 엄마에게 나또한 가벼운 지청구를 했을 뿐인데 당신은 하루종일 고대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응? 아..지금 들어가는 중이야. 조금만 기다려.
/난 점심때 결혼식 갔다와서 배부르니까 너랑 아빠랑 둘이서만 갔다와.
/에이..엄마 안가면 나도 안가. 아빠랑 둘이 무슨 재미로 가. 엄마두 가.
/아빠 지금 나가시니까 둘이 만나서 먹구와.

뭐라 대꾸할새도 없이 전화가 끊어졌다. 사실 엄마와의 외출마저도 김장거리를 사기 위해 시장 몇 번, 그리고 이벤트에 당첨된 곽티슈를 받기 위해 백화점에 갔다가 화교가 만든다는 자장면을 먹었던 것이 최근이었다. 나는 나대로, 엄마는 엄마대로 바빴고, 아빠는 누구보다도 엄마와의 외출을 선호하셨기에 아빠와 둘만의 외출은 거진 없는 편이었다. 때문에 하루에 고작 한 두마디정도의 대화를 하는 아빠와의 외출은 어색할수밖에 없었다.

토요일의 러시아워는 위풍당당했다. 미군 탱크사건 시위와 더불어 대통령선거유세도 한몫 거들고 나선 상태였다. 나 또한 움직일 줄 모르는 버스안에서 쏟아지는 졸음과 저녁 허기와의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느라 힘겨운 상태였다. 차에서 내려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아빠 전화번호를 누르니 없는 번호랜다. 이상하다 싶어 다시 꾹꾹 눌러대고 있는데 저만치 아빠의 모습이 보였다.
/아빠 번호 결번이라는데? 018-384-7XXX아닌가?
아차. 최근에 오빠가 바꿔준 효도폰은 019였다. 너 큰일이다 그러면서도 아빠는 딸과의 오붓한 외식에 싱글벙글이시다. 무안한 맘에 서둘러 고기집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신호등 건너편에 보이는 고기집의 위세에 아빠는 잠시 놀라신 듯 했다. 까짓거,오늘은 내가 계산해야지라는 기특한 생각을 하고 있던 중 건물외벽에 붙은 플랫카드가 눈에 들어왔다.

[갈비탕 3천원 오후 3시까지]

/어? 시간이 넘었네?
/에이. 그냥 먹자. 얼마나 한다구.
/그래두...아부지, 왠지 억울해. 우리 시장에서 순대 사가지고 집에 가서 먹자.
/그러지말고, 그냥 다른데서라도 먹자.
/아유..집에서 먹는게 최고야. 가자.
어린양처럼 아빠는 순순히 따라오신다. 엄마가 좋아하는 순대집은 시장 깊숙히 들어가야만 하기에 아빠와 나는 아무말도 하지않고 순례자들마냥 묵묵히 걷기만 했다. 전화가 왔다. 엄마였다.
여차저차 사정을 말하니 엄마는 그냥 다른 곳에라도 가서 먹고 오랜다. 엄마가 해주는 밥이 제일 맛있다는 내게 엄마는 어이없어하면서도 기분좋은 웃음소리를 선사했다.

이명박시장의 서울뉴타운개발계획에 힘입어 길음시장주변은 새로운 신도시개발현장 분위기가 한창이엇다.
저 아파트는 서향이라서 틀렸다. 저 건물은 얼마인데 지금은 더한다더라.. 아빠는 소풍나온 유치원생마냥 이곳저곳 손으로 가리키며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나야 워낙 맞장구의 달인인지라 그래? 보증금이 얼만데? 건물세는? 오호..정말? 하며 신나게 추임새를 넣으니 아빠는 판소리 한마당을 펼치는 주인공이 된 듯 신나하신다.

집에 돌아오니 엄마가 준비한 특별식, 신김치와 돼지고기를 넣고 끓인 김치찌개가 준비되어 있었다. 엄마는 우리가 사온 순대를 드시고, 아빠와 나는 뜨거운 국물을 후후 불어대며 밥 한그릇을 뚝딱 해치워버렸다.

/아부지, 우리 반주 한잔씩 할까?
/그럴까?

아빠는 아껴둔 양주를, 난 전에 사두었던 매취순을 꺼내 아무말없이 따라 마셨다. 엄마는 이런 우리들 앞에 앉아 가만히 지켜보고 계셨다.